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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이니 Jan 26. 2020

월급이 사라진 일상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월급이 사라졌다. 권고사직도, 부당한 해고도 아니었고 내 발로 나온 X 같은 회사였지만.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이 사라지자 묘하게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익월 25일"


한 달 일한 것에 대한 월급은 그다음 달 25일에 지급됐다. 출근 첫 번째 달에는 그게 그렇게도 싫었는데, 퇴사하고 나니 여행 중에 한 달 치 월급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그 덕에 일을 안 해도 돈을 버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대로 모은다고 모았는데 길었던 여행 덕에 돌아오는 날의 내 통장 잔고는 꽤나 가벼워진 상태였다. 여행할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게 공항에 발을 들여놓자 그야말로 '훅' 들어왔다. 매일 먹고 마시는 것들이 다 돈이었구나. 두 번의 환승과 수당 없는 야근이 반복된 게 이 월급들 때문이었구나 하고.


월급이 사라진 일상은 어딘가 모르게 휘청거린다. 아직 걱정할 만큼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짜다. 적어도 몇 개월은 걱정 없을 만큼은 남겨뒀다. 처음에는 시간을 쪼개서 사람들을 만나던 요일들이 텅텅 빈 게 불안해졌다가, 그다음에는 그냥 내가 쓰는 돈이 아쉬워졌다. 마이너스가 될 건 많은데, 당분간 플러스는 없으니까. 근데 또다시 플러스가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또 무서웠다. 실망과 합리화를 반복하는 그런 회사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쩌나 하고. 이번엔 일전처럼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나기가 그만큼 쉽지는 않을 거란 걸 아니까, 이게 참 여러모로 불안한 거다. 


그래서, 취업 후에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던 '아르바이트 앱'을 다시 설치했다. 저장되어 있는 이력서는 2년 전의 나를 담고 있었다. 패기 넘치는 자기소개서의 문장들과 최대한 끼워 넣는다고 적어 넣은 각종 아르바이트 경험들이 어쩐지 귀엽고, 아주 멀게 느껴졌다. 익숙한 알바 어플을 뒤지는데 최저시급이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시절보다 두 배 가까이는 높아졌는데 이상하게 일자리는 적었다. -높아진 최저시급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을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 있다.- 하필 방학 시즌과 겹쳐 아르바이트를 찾는 경쟁자들이 넘쳐나는 때라 나는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일자리들을 찾아 지원 버튼을 눌렀다. 


누르고, 지원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시간들이 반복됐다. 다시 나를 다른 누군가가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기다리는 이 과정이 나를 아주 자주 저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그걸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니.


몇 번이고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지난주부터 운 좋게 지원한 회사 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파트타이머 같지 않은 9to6의 업무시간이긴 하지만 아르바이트에 맞는 딱 그만큼의 업무와 딱 그만큼의 시급이 주어지는 곳. 묘하게 경계 지어져 있는 '정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의 사이가 어쩐지 씁쓸하기도 하지만 나 역시도 그들에게 그 정도의 거리를 두는 곳. 전 회사에서 일할 땐 팀원 사이에서의 소속감도 중요했고 업무적인 성과도 중요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지냈는데,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시작된 컴퓨터 앞의 일상은 회사에 정식으로 소속된 정직원들과는 그 결이 무척 다르다. 오후 6시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칼퇴근을 하고, 낮아진 급여만큼이나 내가 책임져야 할 일들에서도 해방됐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굳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를 표현하지도, 그렇다고 감추지도 않고 딱 2개월 간 팀의 업무를 '보조'해줄 아르바이트생의 의무만큼 노력한다. 


"익월 20일"

 

이번 달에 일한 돈은 다음 달 20일에 들어온다고 한다. 계약서를 쓰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아, 카드값 결제일이랑 나름 타이밍이 맞네 싶었다. 과거에 쓴 내 돈을 메꾸려면 그보다 더 오래 전의 내가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이것 참 아이러니하다. 월급이 사라진 일상에서 딱 4개월을 버티고 나는 또 월급이 있는 일상으로 쫓기듯 들어왔다. 알람을 맞추고 매일 같은 번호의 버스에 오르고 매월 20일을 기다리는 삶. 2개월 뒤면 또 다른 월급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삶으로.


 


아, 연금복권이나 당첨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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