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조커' 지독한 혹평에 시달려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한 2019년 '기생충'은 호평 '조커', 총기문제와 모방범죄를 야기할 위험한 영화인가? '조커'가 전하는 메시지는?
2019년 두 개의 영화가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또 하나는 토드 필립스의 '조커'이다.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플롯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끝엔 하층민이 상층민에게 분노를 쏟아붓는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작품에 끝엔 결국 살인을 저질렀는데 왜 '기생충'의 폭력은 옹호받고, '조커'의 폭력은 옹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모방범죄와 총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혹평을 받았을까?
1. 우리가 '조커'를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
미치광이 광대, 생방송 중 유재석을 쏴 죽여
만약, 조커의 이야기가 신문기사 헤드라인으로 적게 된다면 이렇게 적힐 것이다. 단편적으로 '아서 플랙'을 바라보게 되면 미치광이도 이런 미치광이가 없다.
금융사 직원을 쏴 죽였고 또 그중 한 명은 도망치는 것을 쫓아가 확인 사살까지 한다. 그리고 살인을 하고 나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미친 듯이 웃는다.그리곤 어머니 '페니'도 죽이고, 자신의 동료까지 죽이고 심지어 생방송 중 진행자인 '머레이'도 죽여버린다. 그리고 폭도들의 위에 서서 웃으며 흥겨운 춤을 춘다.
이런 조커의 유혈이 낭자한 폭력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보다 관객을 더더욱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서 플렉'이 '조커'로 흑화 하는 서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커의 빈곤이 그의 탓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오히려 도전,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훌륭했고 열약한 상황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그가 경멸당하는 정신질환이 신과 자연이 내린 형벌이 아닌 어머니과 그 남자 친구의 학대 결과물임을 알고 있다.
사회자 머레이를 죽인 이유는 부성애를 갈망하는 아서의 결핍 때문임을 알고 있다. '아서'는 머레이를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에게서 인정과 격려를 바랐지만 오히려 머래이는 '아서'를 조롱했다.
'아서'는 꿈을 가지고 버티고 서있는 시민으로서 묘사된다. '아서'가 저지른 살인도 정신질환(타의에 의한), 계속되는 좌절과 주변 인물의 배신, 모든 믿음과 희망이 붕괴되어서 만들어낸 사건임을 우린 알고 있다. 관객은 '아서'의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였고 그렇기에 그를 '미치광이 광대'로 섣부르게 죄인으로 해석하고 조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역설적이게도 '조커'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구잡이로 살인을 하는 저 '조커'에 '공감'했고 잠시나마 일체감을 느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견디고 서 있었지만, 상류층의 억압과 경멸에 무너지는 하층민으로서 우리는 그를 우리와 비슷한 동료 시민으로 인식했다. 마치 우리가 영화'기생충'의 주인공 가족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로 바라봤던 것처럼. 우리는 영화 기생충 속에서 살인을 한 '기택'(송강호)을 긍정하고 이해한 것처럼 '아서'를 긍정해 버렸다.
그리고 우린 '아서'에게서 내 안에 더러운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 불쾌한 감정들을 '조커'에게서 볼 수 있다.
'아서'는 관객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토드 필립스는 영화'조커'를 통해 관객의 가장 부끄러운 밑바닥을 우리 얼굴에 들이밀었다.
연민과 함께 오는 더 큰 불쾌감, 배덕감....
'저 더러운 것이 나와 같다니...!',
'나는 저 미치광이 살인마와는 달라!'
관객은 내 안에 부정한 것들을 '조커'에게 '투영'하고 '투사'하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내가 정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은 내면의 부정적인 부분들을 '조커'에게 밀어 넣었고, '조커'라는 쓰레기봉투를 멀리멀리 내던짐으로써 내면의 문제를 쉽고 간편하게 해결해 버린다.
2. 너는 '아서'처럼 흑화 안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우리는 '조커'를 미치광이 죄인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내가 그 상황에 쳐해 있다면? 날 몇십 년째 발목 잡고 있는 정신질환이 사실 어머니가 만든 결과라면? 직장 동료가 날 배신한다면? 온 세상이 상류층은 나의 빈곤에 조소하고, 비슷한 하층민들이 날 린치하고 괴롭힌다면 그리고 그것이 한순간에 다가온다면 우리가 과연 '아서 플랙'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영화 '조커'는 비극의 주인공인 그들과 우리는 다를 바 없다. 비극 속 주인공의 재앙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우리와 특별히 다른 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겪을 재앙을 우리가 좋은 조건과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 약간의 운 덕에 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악인이라고 치부하는 존재를 '다시 바라보고', 죄인과 나를 나누는 강철 벽을 허물 수 있고, 그들과 나를 나누는 벽을 무너뜨리며 우리는 ‘공감’할 수 있다.
타락의 주인공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내면의 악'을 경계하게 된다. 내 안에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조커'가 있음을... 나에게도 인종학살을 자행한 아우슈비츠의 나치 간수가 있음을... '아서'를 흑화 시킨 경멸 어린 눈을 가진 동료 시민이 있음을... 우리는 '조커'에게 동질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악을 경계한다.
겸손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도 언제든지 '아서 플랙'처럼 신의 변덕으로 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비극'의 주인공에게 우린 더이성 우월한 태도를 가지긴 어렵다. 신 앞에서 재앙의 변덕 속에 우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마치며...
총기 난사, 모방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려와 달리 누군가는 온정이 담긴 눈으로 우리 주변의 ‘아서’ 혹은 '조커'들을 바라본다. 조커'의 살인에 호쾌함과 짜릿함 보다 오히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연민과 안타까움에 가까운 것 같다.
. '아서'가 원한 건 그저 누군가의 자그마한 존중, 따뜻한 격려 한 마디인데...
누군가가 '아서'에게 약간의 도움의 손길을 주었더라면... 타락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비극은 오히려 우리 주변에 '아서'와 같이 소외된 존재에게 작은 존중, 친절함을 가지게 만드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