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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업하는 선생님 May 31. 2023

어느 날 나는 벌레가 되었다.

카프카의 <변신> 파트-1

착취적 체제, 자본주의


사회제도와 물질은 본디 인간의 자유와 안락함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생산물과 사람 사이의 지위는 역전되어 오히려 생산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와 회사라는 조직은 인간을 자신들을 운행케 하는 기계의 부품으로 작동케 하고, 이를 위해 사회가 규정한 순종적인 노동자와 시민으로서 존재하길 강요합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대다수 사람에겐 안락함과 사랑의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겐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일정한 역할 하도록 강요하는 올가미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생계의 위협, 사회적 인정과 소속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억압으로 다가오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 가사, 육아, 향락에 몰두하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두려울 이유는 없지만 주입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강박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하게 합니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추락해 버립니다. 다른 존재에 몰입하고,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나는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존재와 함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어젠다를 마치 나의 어젠다처럼 여기며 국가, 이념, 사상, 단체 등과 합일됩니다. 좌파 우파, 민족, 국가, ~ism 등등.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했듯이. 전통적 종교의 쇠락 이후 새로운 자연법칙 종교가 새로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합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가 그러한 예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에 우리들이 종교적 맹신, 광신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카프카는 자본주의와 가족이라는 일견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체제가 얼마나 <허위적 세상>이고 <착취적> 일 수 있음을 고발합니다.






카프카의 <변신>



카프카의 <변신> 속 주인공 그레고르는 변신하기 전에는 여행 세일즈맨으로 가족을 부양합니다. 그레고르의 삶은 직업 활동에만 갇혀 있고 그의 내면상태도 그러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들어와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 판매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이 든 후 새벽 일찍 다시 일하는 삶. 변변한 취미생활 하나 없고, 혈기왕성 남성이지만 여성과의 경험과도 유리되어 있습니다.




힘든 외판사원 노릇에 대한 괴로움, 사장에 대한 억눌린 공격성이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지 <부모의 채무>는 끔찍한 직업생활을 계속하도록 강요했고, 자신의 희생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그레고르의 행복이요.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레고리의 헌신 덕에 대다수의 도시 유럽인들이 쓰레기, 질병, 설치류로 가득한 혼잡하고 오염된 빈민가에서 살았던 시절에 가족들은 방 2개에 거실 하나가 있는 집에서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족 부양자로서의 고단한 책임과 의무가 그레고리의 등 위에 얹어져 있고 그의 내면세계는 오로지 <가족&일>이었습니다.




일…일… 돈 만드는 기계로서 소모되는 와중 그레고르에게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바로, 잠에서 깨어나자 그가 거대한 갑충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기차를 타야 하는데… 6시 넘게 잠에서 깨어나고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고 게다가 끔찍한 벌레로 변신하다니… 가족들도 자신들의 생계와 이 안락함이 그레고르의 취업에 달려있으니 그의 출근에 신경을 씁니다. ‘너의 일자리는 절대로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다.’라는 지배인의 협박과 가족들의 호들갑에 그레고르는 힘겹게 벌레의 몸으로 열쇠를 돌려 문 밖으로 나와 그 끔찍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어머니는 혼절하고, 지배인은 그레고리의 변명(짐승 소리)을 듣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고. 아버지는 두 주먹을 휘두르고 지팡이와 신문지를 움켜쥐어 그레고르를 방으로 밀어 넣어버립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한 마리의 벌레로 전락해 노동자의 책임과 가족 부양의 부담에서 벗어났습니다. 여동생은 처음엔 그레고르를 걱정하고 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병에서 벗어나질 못하자 가족들은 그를 집안의 쓸모없고 성가신 짐으로 여기며 경멸하기 시작합니다. 화폐 재생산 능력의 상실, 노동 능력의 상실은 그레고리를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제시켰고 그다음 가족에게서 소외시켰습니다. 그럼에도 그레고르는 자신이 한 마리 거대한 벌레로 변했다는 처지에 한탄보다 직업 상실과 가족들의 삶에 대해서 걱정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거대한 착취관계를 보여주는 생동감 넘치는 스크린이었습니다.  그레고르가 가족의 목소리와 가족들의 세계 거실에만 몰두하는 모습, <일과 가족>에 대한 생각 외에 아무런 생각을 못하는 정신. ‘나’는 거세된 그의 황폐한 내면세계.  이 모든 것들은 1인칭으로 감상하는 우릴 소름 돋게 만들었고, 우리가 저런 착취적 세계와 정신의 감옥 속에 갇혀있지 않나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경제적 관계의 역전은 가족 내 권력관계의 역전으로 드러났습니다. 집안의 가장으로 생각되었던 그레고르는 이제 가족의 최하위 계층 짐덩어리로 여겨졌고. 생계유지로 노동에만 전념해야만 하는 가족들에겐 이제 그레고르는 더 이상 가족으로도 여겨지지 않고, 일상을 깨부순 악몽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엔 여동생의 선고로 <가족>밖에 없던 그레고르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던 그레고르는 죽게 됩니다.



<여동생의 선고>

그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이제껏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 우리 자신의 불행이었어요. 어째서 저것이 그레고르란 말이에요? 만일 정말 그레고르라면 사람이 저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자기 스스로 나가버렸을 겁니다. 그러면 오빠는 없어졌을 망정 우리는 안심하고 살면서 언제까지나 오빠를 존경하며 떠올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하숙인들을 쫓아내고 나중에는 아마 이 집 전체를 점령하고 우리까지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게 할 거예요. 저것 좀 봐요, 아버지.

- 카프카 <변신> 중



일벌레로서 가족 생계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 ‘그’는 사물을 지칭하는 ‘그것’이 되었고… 진짜 벌레가 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분명 착취당한 자는 그레고르이고 악역은 가족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가해자 취급하고 자신을 피해자처럼 여깁니다. 가족들은 그레고리의 존재로부터 억압받고 그레고르의 죽음으로 해피앤딩을 맞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타난다. 그때까지 그레고르는 오로지 원망보단 가족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마지막엔 먹지도 않아 스스로를 희생시켜 가족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확인한 가족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성호를 그었고 가족도 그를 따라 성호를 긋습니다. 성호는 그레고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의미가 아닌, 신에게 드리는 감사함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망가진 물건’처럼 쓰레기로 처리되고, 가족들은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

그네들은 같이 집을 나섰다. 몇 달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찻간에는 그들뿐이었다. 따스한 햇빛이 흘러들었다. 그들은 편안히 앉아 등을 기대고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토실토실한 젊은 육체를 쭉 펴자 그들에겐 그 모습이 마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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