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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업하는 선생님 Jun 01. 2023

카프카에게서 배우는 나를 찾는 방법

카프카의 <변신> 파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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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생애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체코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걸핏하면 프란츠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고 폭언을 일삼으면서 키웠습니다. 아버지에 의견에 따라 프라하의 약 10%의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 살았고, 대학도 랍비가 되길 희망하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법대로 진학했습니다. 




폭군적인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프란츠 카프카는 두려워했고, 지나치게 복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외의 감정, 주체적인 자아에 대한 갈망은 카프카의 다른 소설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글과 창작은 카프카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탈출구였습니다. 그렇기에 카프카는 근무시간이 짧은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며 오후 2시쯤 퇴근해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에 깨어나 글을 쓰고 다시 잠을 자며 겸업작가로서 살아갔습니다.



1912년 프카는 심각한 위기 상황 속에 처해있었고, 그때 <변신>을 창작했습니다. 펠리체 바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바우어와의 관계에서 결혼 생활로 자신의 창작활동이 위협받을까 걱정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석면공장의 공동운영을 사촌과 함께 하도록 압박했고, 어머니는 시민사회의 전통적 생활방식으로 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여동생 또한 공장 문제에서 아버지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카프카는 가족에게 큰 배신감과 가족이 기대하는 역할을 해낼 수 없는 자신에 대해 깊은 절망감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위기 상황'과 '감정'은 고스란히 <변신> 속에 쏟아졌습니다.



자기혐오와 내면의 불안이 형상화된 흉측한 갑충... 막대기를 마구 휘두르며 신적 권위로 처벌을 내리는 그레고리 아버지… 아버지(신)에게 사과(선악과) 공격을 당해 거실(에덴동산)에서 떠나는 장면… 오빠를 배신하는 여동생...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그레고리 등.... 이러한 작품 속의 장면을 보면 ‘그레고리’는 카프카의 분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레고리는 카프카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세대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라캉 -



카프카의 <변신>은 비인간적인 전기 자본주의와 가족에 대한 고발일 뿐만 아니라.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소외시키는 모든 것들에 대한 폭로였습니다.



작중 그레고르는 5년간 가장이라는 이유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갔습니다. 영업직 사원으로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마모되었고, 가족에게선 물적 정서적으로 착취당해 왔습니다. 체제 속에선 그레고리는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의 행복은 그의 행복이 아니었고 그것은 가족의 행복이었고 전도된 행복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달라지고, 사는 시대가 달라졌지만 그레고리가 외부의 목소리에 자신의 욕망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그레고리와 유사한 상황에 쳐해 있습니다. 오히려 그 방식이 교묘해지고 기만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종교에 따라 화폐 재생산 능력과 유용성에 따라 집단 내 지위와 소속 가능 여부가 결정됩니다. 과거엔 스펙 쌓기와 학벌이 평가 기준이었지만 요즈음은 퍼스널 브랜드, SNS계정 등이 평가 기준이고 이것들을 활용해 자신을 자본주의 상품으로 전시해야 합니다. 메스미디어에서는 부동산… 주식…FIRE… 100억 신화… 등등 가짜 신들을 보여주고 명품, 고급 스포츠카 등을 보여주며 이게 너희들이 도달하고 쟁취해야 할 목표라고 우리의 뇌를 폭격합니다. 그레고리가 <가족 빚>의 상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했었지만, 요즈음은 <주택 담보 대출> 상환을 위해 20년~30년 자신의 삶을 소모해야 합니다. 그리곤 벌집 같은 시멘트에 구멍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삶이라고 자위하게 합니다.



이런 자아 상실의 위기 상황 속 그레고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구원의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립




그레고리는 벌레로 변신하며 노동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는 비극적인 사건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그레고리는 그토록 힘겨웠던 <가장의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남을 위해 써야만 했던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 안에서 가지고, 외부와의 접촉이 끊기자

그레고리 내면의 욕망이 드러났습니다. 





그레고리는 자신과 평생을 함께 했던 '책상'을 뺏기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레고리는 자신의 '기억과 역사'를 욕망했습니다. 


그레고리 이틀 밤을 지세며 만든 '액자'와 그 안에 꽂힌 여자 사진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창작과 여성'을 욕망했습니다.


방 안에서 여동생의 바이올린 선율을 듣자 감동했습니다. 그는 '예술'을 욕망했습니다.



이 모든 욕망은 <외부의 소음>이 사라지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고립 속에서 자신을 찾은 그레고리를 통해 우리는 나를 찾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고립'입니다.  <외부의 목소리>를 끄고 <내면의 목소리>을 듣는 것. 하루 살고 하루 벌어먹기 가쁘고, 커리어를 쌓고, 돈을 모으는 게 시급한 것 같지만 외부에서 주입한 두려움과 강박을 잠시 내려두는 것입니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나의 욕망을 찾는 것. <사회, 가족, 친구>의 요구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로 위와 같은 고립을 하고 이 솟아오르는 감정과 욕구가 타인에 의해 주입된 감정은 아닌지 면밀한 검토와 판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질문 하나 던지고 긴 글 마칩니다. 


당신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입니까? <나>의 욕망입니까?



감사합니다. 여러분 다음에 더 좋은 글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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