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음 May 11. 2021

그대들의 세상은 안전한가요?

-겁쟁이가 됐다.

평일 저녁 10시, 일면식이 없는 아저씨가 초인종을 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몰골로 편하게 널브러져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열 생각도 못하고 잔뜩 경계 태세로 무슨 일이냐고 벌벌 떨며 물었다.   

       

“집에 있는지 확인해달래요!!!”       

   

모르는 아저씨는 관리실에서 온 직원분이셨고 목소리에는 짜증과 화가 가득했다. 이 직원분이 오밤중에 신경질적으로 초인종을 누른 이유는 전화를 받지 않는 딸이 걱정된 노모가 딸이 걱정된다며 빨리 우리 딸 집에 가보라고 해서였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던 아저씨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딱 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황금 같은 시간에 사람이 집에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저씨는 문밖에서 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내 어머니께 알렸다.          


“집에 있어요!”          


관리실 직원분이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셨고 그제야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가 와있었다. 엄마의 문자엔 걱정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엔 화를 냈고 마지막쯤엔 제발...이라는 말로 끝맺음되어 있었다. 


 마지막 문자에 정신을 차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통화 중이다.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엄마는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예민해진다. 어렸을 때도 공연을 좋아하는 딸이 모든 앙코르곡을 듣고 오느라 막차를 겨우 잡아타고 오면 횡단보도에 울먹이며 서계셨다. 일 때문에 밤샘 작업을 하게 되면 일을 때려치우라고 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분인 줄 알면서도 가끔 이렇게 본의 아니게 사고를 친다. 이 세상의 딸들은 전화를 재깍재깍 안 받는 것이 불효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지나친 과보호가 부끄럽고 싫었다. 연락만 안 되면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어머니 때문에 ‘공주병’ ‘온실 속의 화초’등등의 놀림을 받았고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일부러 전화를 더 안 받았다. 일종의 반항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별 의미도 없고 별 이득도 없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내가 연락을 안 받을수록 부모님의 연락 범위는 점점 더 넓어졌고 나는 얼굴 붉힐 일이 더 많아졌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굳이 굳이 죽자고 전화를 안 받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반항을 한 대는 남동생과 나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동생이 술을 먹고 이틀을 안 들어오는데도 전화한 번하고는 신경을 안 쓰시는 것과 달리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통금시간이 있었다. 동생은 늦게 와도 되는데 나는 왜 안돼냐고 객기를 부리면 부모님의 대답은 언제나 ‘여자랑 남자랑 같냐!!’였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우리 부모님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며 또다시 별 의미도 없고 별 이득도 없는 반항을 다시 되풀이했다.     


그랬던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최근에 연이어 일어나는 여성 대상의 흉악 범죄 뉴스를 봐서 인건 지, 관리실 직원분이 가신 지 한참이 지나서도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인 줄이야. 


여럿이 가는 여행보다 혼자 가는 여행을 선호하고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게 오히려 즐겁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겨우 예기치 않은 초인종 소리 몇 번에 와르르 무너졌다.      


마음을 진정하고 의자에 앉아 생각을 해보니 이 모든 상황이 코미디 같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관리실에 전화하는 엄마나 낯선 이의 방문만으로 벌벌 떠는 나나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우린... 이 세상이 무섭다.     


최근에 연이어 일어난 여성과 유아 관련 범죄들을 보면서 세상이 힘들어지면 가장 힘들어지는 건 힘이 약한 자들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살기가 힘들어지면 꼭 물리적인 힘이 약한 사람들이 범죄의 대상이 된다. 흡사 정글과 같다. 정글에 기근이 들면 힘없고 약한 동물들부터 죽어 나가기 시작하듯이 사람이 사는 세상도 사람들의 마음에 기근이 들면 힘없는 사람들이 범죄자들의 타깃이 된다. 기분 상하는 뉴스를 너무 많이 봐서 이렇게 떨리는 거려니 하며 마음을 달래 보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다. 엄마는 목소리만 들어도 탈진 상태라는 것이 짐작이 될 정도로 지쳐있었고 우리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안 좋다.     


주말에 눈뜨자마자 본가로 갈 테니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엄마를 겨우 달래고 이 모든 사단의 시발점인 핸드폰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나는 고작 전화를 잠시 안 받은 것뿐이었는데...라고 생각하니 참 어처구니가 없는 하루다. 잠을 잘 자긴 글렀고 유튜브에서 뺑소니 잡는 아저씨, 몰카범 잡는 제주 시민들, 곤경에 처한 할머니를 구하는 시민 영웅 등의 영상을 보며 아직은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초상 [클럽하우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