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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시시 Nov 13. 2022

물음표 물음표 찍게 만들어

번역하는 마음은 위태로움

늦은 저녁으로 뜨끈한 장칼국수를 먹고 희랑 밤공기를 맡으며 공원을 걸었다. 연못에는 달빛이 비쳤다. 희가 말했다.

“배시시야, 하늘 봐. 달이 윤곽만 남았어.”


그건 탐나는 표현이었다. 나중에 어딘가에 써먹어도 되냐고 물었고 희는 그럼그럼~이라고 기꺼이 허락해줬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일상의 윤곽을 맴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띵-. 아이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연락 올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확신으로 휴대폰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희는 재빠르게 화면을 확인했다. 픽, 하고 입꼬리가 올라간 희가 말했다. “나 할머니한테 ‘하랑이’라고 문자 왔는데, 이거 ‘사랑해’라는 뜻이겠지?”


희는 항상 단번에 할머니 어를 번역해냈다. 장칼국수를 먹기 전에 난해한 외국어 텍스트를 번역하다가  뛰쳐나와서 그런지, 희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언어 외 지식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건 희가 가족 이야기를 할 때 툭툭 나타나는 주특기다. 얘랑 친한 사람들만 알고 있는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나는 방금 전 너의 멘트가 얼마나 심쿵인지 달빛 때문이 아니라, 만약에 대낮에 강의실에서 들어도 설렐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어서 ‘하랑이’라는 단어는 정말 사랑스러운 메시지라는 추신도 빼먹지 않았다.


그 애는 내 말을 듣더니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분명히 자기의 할머니한테서 배웠을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희의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 내용은 물론, 사랑한다고 보내려 했는데 아니, 이게 어떻게 해도 안 지워져서 전화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답답하면 다이렉트로다가 전화를 걸어버리는 멋진 여인의 박력 있는 문장 해설. 알콩달콩한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날은 전화를 하는 희와 슬그머니 떨어져서 밤 산책을 마저 끝냈다.



그다음 날에는 어떤 나라의 현대 철학과 중세 문학의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한 난해한 텍스트를 만났다. 아오, 내가 이걸 다 어떻게 아냐고요, 하고 속마음이 다 보이도록 끙끙댔는지, 앞에 앉은 번역가가 가만히 정지된 나에게 배시시 씨는 텍스트에 호기심을 더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호기심, 그건 대상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내 번역이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거든요, 여기에 만족하고 더는 안 궁금하면 어떡하나 싶은데, 번역가가 말했다.


“사랑하면 궁금해져요”

네..? 저는 사실 이 텍스트가 사랑스럽지는 않아요. 번역가가 이어서 말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해야 하는 일도 있는데, 그럴 땐 스스로한테 최면을 거는 것도 필요하죠. 이별하는 시기를 짐작해도, 지긋지긋하게 사랑하고, 훌훌 털어버리는 사랑도 있지 않나요?”


맞다 맞다, 상대와의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강한 예감으로 시작되는 사랑도 있었지.


참나, 어떤 일의 전문가는 이렇게 탄생하나? 그러고 보면 이 분은 역시 참 말빨이 좋단 말이야.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얘랑 나랑 만날 운명이었으니, ㅅ..스릉..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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