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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오 Mar 14. 2021

일과 결혼

인생퀘스트


나는 건축가다.


나는 건축가다.

아빠는 건설회사에 다니셨다. 사무실에 놀러 가면 널부러져 있는 도면들이 마냥 멋져 보였다. 아빠도 대단한 일을 해 내는 사람으로 보여 멋졌다. 그래서 막연히 동경해왔고 고3 학과를 선택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내가 건축과를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한숨을 쉬었다. 힘든데 굳이 그 길로 가야 하냐고.. 그래도 가고 싶었다. 설계수업 준비를 하면서 마치 작가라도 된 것처럼 겉멋도 부려보기도 했고 취업해 일하면서는 끝맺어가는 프로젝트들 마다 느껴지는 희열감과 애정도 쌓여갔다. 또 운이 좋게도 늘 곁에 좋은 동료, 좋은 친구들이 함께 했다. 힘들어도 커피 마시며 풀어놓는 넋두리에 풀리곤 했다. 그렇게 건축은 내 인생에 당연한 길인 것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건축일을 한다는 건 몸은 몸대로 고생하면서 인정은 못 받는 직업 중 하나이다. 단어가 거창해 건축'가'이지, 우리네 사이에선 설계'쟁이'라고도 한다. 업계에 있어보면 나름대로 세상에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일인데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돈, 돈' 하다보니 건축설계는 건축 내에서도 시공이나 개발에 밀려 하청업체 취급을 받거나 밤샘은 당연한 박봉직으로 인식된다.

내가 다녀온 직장들은 설계사무소이다. 하루 일과는 9시에 믹스커피 두 봉지 털어 커피를 타고선 업무를 시작/점심시간 후딱 밥을 해치우고 낮잠... /오후 6시 저녁식사/밤 11시 반 막차 끊기기 전 퇴근..

주 52시간제라고 TV에서는 떠들어 댔지만, 타 부서의 어느 상무놈은 9시가 되자 퇴근 찍고 와서 일하라고 시켰단다. 주말 출근은 당연한 것으로 지껄이면서..(그렇다고 야근수당이나, 주말 수당은 없는..) 우리 팀도 마감 스케줄을 맞추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11시, 12시까지 일할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윗사람 소신이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라 주말 출근을 안 하는 게 어디냐 했다.

현실적으로 매일 하는 야근은 몸을 그냥 상하게 만들었다. 갑상선기능도 안 좋아져 평생 약을 먹게 되었다. 그렇지만 승진도 하고 싶었고 프로페셔널한 여성 건축가로 살아남고 싶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함께하는 직원들을 챙겨가며 내 일도 해야 하니 마감기한을 맞추려면 혼자서라도 야근을 해야 했다. 감기몸살이 심하게 걸렸던 때 부장은 미안하지만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며 집에 보내줄 수 없다고 했었다. 고생하는 팀원들에게도 눈치가 보였다. 회사 인근의 이비인후과에 가서 강한 진통제를 보름 넘게 맞아가며 일을 했다. 쉬라는데 자꾸 병원에 와서 진통제를 맞겠다 하니 의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시냐. 나라 구할일도 아닌데 집에 가서 쉬어라. 만약 지금 임신하고 있는 상태면 유산이 될 만큼 강한 주사다. 이걸 맞는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를 계속 말했다. 정말 의사 말처럼 이때 이후 생리주기도 꼬이고, 하혈도 했다, 한 달에 생리를 두 번을 했다, 난리가 났다.




결혼


구남친/현남편과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만나는 날 늦잠 잔줄 알고 시간을 착각해 한 시간이나 일찍 나갔었는데 나는 솔직히 이 소개팅 망했다 생각했었다. '그냥 편하게 친구 본다 생각해야겠다.' 했던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있다. 둘 다 결혼할 나이(나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으른들의 말로는 지났다하니)가 지나서인지.. 정말 눈이 돌아서인지 둘이 미쳐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 준비를 할 당시에 마감기한과 겹쳐져 있었다. 지방에서 근무하던 남자친구는 금요일이 되면 나를 픽업하러 올라와 회사 근처를 빙빙 돌거나 비싼 강남의 주차료를 물어가며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를 태워 친정에 데려다주고 그 새벽에 충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걸 몇 달 동안 했다.

결혼 준비는 팀 사람들만 알아오다 소문으로 퍼진듯했다. 나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부서의 윗사람들의 반응은 희한했다. 일로 잠깐 찾아간 다른 팀의 부장은

- 남편 될 사람이 00다닌다며. 넌 능력도 좋다. 어떻게 만났냐? 너도 결혼하면 회사 그만두겠네?

이 무슨 개소리인가. 쌍팔년도 이야기같은 것들이 현재도 ing라는 게 비참했다. 그래서 결혼 준비도 대놓고 할 수 없었다. 결혼해서 곧 그만둘 거니 일 안 하고 결혼 준비 나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당시 남편은 회사 전부 그런 분위기라면 오래 다닐 곳은 아니구나'싶었다고 한다. 또 나에게는 회사가 많은 것을 보상해주는 것도 아닌데, 책임감 하나로 소중한 건강과 시간을 희생 할 필요가 있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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