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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Oct 31. 2021

어떤 하루

Live and Leave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큰방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데 문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죽음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내가 겪게 될 '나의 죽음'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날이다.

그 당시에 왜 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은 해 갑작스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아직도 선명히 그날의 감정이 기억이 난다. 피해 갈 수 없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일이라는 것에 겁이 났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내가 죽어도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내가 죽고 없는데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학원 갈 시간이 되어 그 방을 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날, 13살의 나는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2002년 1월의 어느 날, 새해맞이로 온 외가 식구들이 우리 가족의 새 보금자리로 모였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동생이 반려견 환희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당에 내가 좋아하는 따듯한 햇살이 가득한 2층 주택. 부모님 두 분의 고생의 결실이었다. 그렇게 친척들로 붐비던 새해 한주를 보내고 동생은 남은 방학기간 이모 댁에서 보내기 위해 사촌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며칠 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보통의 겨울날이었다. 일찍이 출근하는 아빠를 배웅하고 엄마와 같은 담요 아래 다른 방향으로 누워 아침방송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갑자기 뭔가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듯 '아 맞다! 오늘 교복 사러 안 갈래? 출근하기 전에 시간 좀 되는데? 나가서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가게를 운영하던 엄마는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할 거라며 교복을 사러 가자고 했다. 항상 일로 바빴던 엄마의 데이트 제안에 신이 난 나는 급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곳저곳 구경 다니며 교복도 맞추고 점심으로는 내가 먹고 싶었던 순대와 떡볶이도 먹으며 엄마와 딸의 시간을 가졌다. 가게 오픈 시간이 다가오자 엄마는 자신의 차는 근처에 두고 직원 차를 타고 같이 갈 테니 나에게는 버스를 타고 들어가라고 했고 투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순순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시간쯤 엄마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빨래 돌려놓은 걸 깜빡했으니 꼭 널어두라는 이야기였다.

'응. 알겠어. 언제 오는데? 응..일찍 와.' 일찍 못 온다는 걸 알면서도 투정 부리듯 항상 하는 멘트였다. 그날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집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잠결이라 그랬는지 기분 좋지 않은 벨 소리였다. 누군가 싶어 거실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을 때는 이미 아빠가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 네. 네. 네??'라고 답하는 아빠의 반응, 목소리 톤 그리고 제스처를 통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순간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날 엄마가 돌아오는 걸 볼 수 없었고 엄마는 그 해 우리의 새 보금자리에 봄이 오는 걸 보지 못했다.

그날은 내가 추억할 수 있는 엄마와의 마지막 하루였고 마지막 식사였으며 마지막 통화였다.

교복을 사러 가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었더라면, 그 통화가 우리의 마지막 통화라는 걸 알았더라면.

한동안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상실감이 나를 억눌렀다. 그렇게 시간은, 세상은 내가 사랑했던 엄마를 잊은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갔다.


사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당시 주변 어른 중 내가 겪고 있던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싸움과 소란만 일으키고는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른다운 어른은 없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나는 죽음을 가까이하고 살아온 편이다.

금기시되어오는 이 단어는 내게 삶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가끔 처음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13살의 나처럼 혼자서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다만 눈물은 없다. 지금은 마냥 억울해야 할 일이 아님을 알기에.



최근,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가까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그 경험을 통해 이전보다 더 삶에 대한 여유를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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