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27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회마을, 월영교, 도산서원, 부용대 등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숙소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발품을 팔아 찾아간 식당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주인장은 배려심 깊게도 우리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덕에 우리는 조용히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27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나는 그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그동안 나랑 살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어?"
그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다시 물었다.
"정말? 진짜 하나도 없어? 난 있는데."
"힘든 건 다 까먹었어. 힘든 걸 왜 기억해? 지나간 일은 중요하지 않아.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가 왜 중요해?"
남편의 대답은 단호했다. 생각해보니, 안 좋은 일을 오래 기억할 필요는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당신의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 일이 없는 게 맞지?"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말을 긍정해 주었다.
나는 또 물었다.
"당신은 나랑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지 않아?"
"당연히 후회하지 않지. 오히려 좋았고, 고마운 일이야."
남편의 대답에 안도하며,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특별히 바라는 건 없어. 네가 즐겁게 살면 그걸로 충분해.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위해 고생했으니까 이제는 좀 쉬어도 돼. 내가 벌어올 테니 너는 돈 때문에 일할 필요 없어."
남편의 답은 깊은 생각을 하게 했다. 자신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이 느껴졌다. 남편이 성심껏 답해주는 모습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많이 사주잖아? 사 주는 게 아깝지 않아?"
"뭐가 아까워. 너는 나한테 주는 게 아까워? 난 전혀 아니야. 오히려 즐겁지."
"난 아까울 때도 있는데."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살면서 가끔은 손해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용하던 남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부부 사이에 손해가 어딨어?"
"그럼 뭐가 있어?" 그의 대답이 궁금해 다시 물었다.
"부부는 손익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야. 무언가 해주면서 손익을 따지면 그건 부부가 아니지. 손익은 밖에서 따지는 거야. '손해'라는 단어는 부부 사이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야."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괜히 머쓱해져 말했다.
"당신은 확실히 나보다 큰 그릇이야. 당신이 양푼이라면 난 종지야."
남편은 웃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의 마음이야. 가장이 되면 철이 들게 돼.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내놓을 수 있거든. 내가 열심히 일한 것도 모두 가족을 위해서야. 만약 혼자였다면 지금처럼 부지런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남편의 진심 어린 답변에 감동했고, 자꾸만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살면 돼. 미래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지금도 우린 여행 다니고, 산에 다니면서 행복하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서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면 돼. 지난 시간 함께해서 행복했으니,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일상을 놀이터처럼 생각하며 살아가자."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뭘 바란다는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어. 옆에만 있어주면 돼. 뭘 해줘야 한다는 건 기대잖아.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욕심이지. 기대가 크면 관계가 힘들어져.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해야지. 부부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야.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리고 하나 더 당부하자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자. 무식하게 참지 말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답변은 술술 이어졌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날의 대화는 27주년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