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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Nov 07. 2021

생각이 많아진 날의 생각 –<미용사의 남편>을 보았다.

삶의 불균형에 기꺼이 기우뚱거리되, 유머를 잃지 않기를 바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내 생각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 나는 정말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 내 생각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의 취침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잠깐 잠에서 깨어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생각의 끝을 찾을 수 없어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에 든 생각은 오래전 보았던 프랑스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었다. 원제는 ‘미용사의 남편’이다. 생각이 먼저였는지 잠에서 깬 것이 먼저였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방의 색과 감긴 눈 사이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에게 프랑스 영화는 좀 특이한 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특정 장면이 내 뇌리에 부지불식간 박혀있다는 거다. 그런 장면의 특징은 어떤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흐릿하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묘한 강렬함을 남기는 장면들.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이 영화는 ‘뭐야, 정말 프랑스 영화 같다.’(알듯 모를듯한 멜랑콜리라니) 여기까지였다. 여주(여자 주인공)가 폭풍우 치던 밤에 남주와 사랑을 나누고 서둘러 빗속으로 사라지더니 폭풍우로 요동치는 방파제에 망설임도 없이 뛰어든다. 정말 느닷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지루할 정도로 집중되어 있던 둘만의 사랑 속에서 죽음은 좀 갑작스럽다. 모든 이야기에는 상징이 있다는 걸 찬찬히 생각하더라도 이해가 쉽지 않은 장면이다. 그런데 이 느닷없는 장면이 내 새벽잠을 깨웠다. 그리고 예감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사랑이라는 관념이 이 장면과 같지 않았는가? (사랑은 절정의 순간에 죽음을 경험하듯 끝내는 것이다.) 지독한 숙주를 만난 것처럼 내 몸은 조금 오그라들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그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소설도 시도 영화도 사람도 다시 보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새벽에 생각난 것은 여자가 느닷없이 폭풍우 치는 밤에 바다로 뛰어든 장면이었다. 그녀에게 유언장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순간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내가 먼저 떠나요. 당신의 사랑이 식기 전에 떠나려고 합니다. 불행이 찾아오기 전에 떠나려고 합니다. 당신이 선물한 내 생의 가장 사랑스러운 날들 그 기억을 가지고 가요.”


  사랑의 절정을 간직하고 죽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간이 가는 것을 싫어하고 늙는다는 것을 역겹게 생각했던 그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런 젊음의 한때를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사랑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꼭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른 이면이거나 사는 일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가까웠던 사람들의 죽음을 곁에서 보아 오면서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늘 내 곁에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존재했다.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을 안고 끝끝내 살기를 원했으나 죽기도 하고 심정지가 오듯 순식간에 죽기도 한다. 사랑이 무어란 말인가?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균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배우에 대해 말하니 남자가 그 배우를 조롱하는 대답을 했다. 여자는 마음이 상해 이발을 하던 가위질을 멈추고 차갑게 가위를 도구함에 던졌다. 노인요양시설에 사는 여자의 지인을 만나고 난 후 여자는 늙음에 대해 생각한다. 늙는다는 것은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면서 감정의 변화가 바뀌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자는 어느 대화 끝에 딱히 남자에게 하는 말은 아닌 듯 ‘삶이 역겨워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언제든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한다. 여자는 시간을 사는 사람이 아닌, 공간을 사는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수많은 불균형의 상태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과연 이것이 바로 사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씩 마음에 균열을 내며 오는 것이 아닌가. 일테면, 침묵하게 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너는 왜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거니?’라고 생각을 말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밤에 한 침대에서 잠을 자다 몸이 닿는 것이 귀찮아 침대 구석으로 몰리는 순간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서로 타인이라는 걸 속으로 되뇔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그런 ‘수많은 불균형의 순간’은 그려지지 않는다. 왜냐면, 여자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전에 사라진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아니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서로의 순간에 죽어버린다. 남자에게는 ‘언제나 앉아있는 그 자리에 앉아보세요.’라고 말하고서 말이다. 불균형의 순간순간이 사는 일에서 사라진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죽은 후에도 언제나 앉아있던 그 자리에 앉아 골똘히 낱말 맞추기 퍼즐을 한다. 미용사가 없는 미용실에 여전히 손님들이 기웃거린다. 낱말 맞추기를 하다가 남자는 손님에게 머리를 감겠냐고 묻는다. 손님의 머리를 대충 감겨주고 남자는 춤을 춘다. 이 춤은 영화의 장면에 여러 번 등장한다. 12살의 앙뚜완(남주), 여자와 결혼할 때, 사랑을 나눌 때, 이발하지 않겠다는 아이를 설득시킬 때, 미용사가 없는 미용실에서 손님을 맞을 때. 남자의 일상을 지키게 하는 것이 마치 이 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춤이 끝나자 남자는 다시 언제나 앉아있던 그 자리에 앉아 낱말 맞추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미용사가 올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함께 한 일상의 삶은 그렇게 무섭도록 섬뜩하다. 조금씩 색은 바래지만 그 형태와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일상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어떤 것도 옳고 그름 속에 있지 않다.

   

  새벽에 떠올랐던 장면이 여자가 폭풍우 치는 밤에 바다로 뛰어든 것이라면, 다시 본 장면에서는 남자가 낱말 맞추기를 하고 춤을 추고 손님의 머리를 감기는 장면이다. 삶은 혹은 사랑은,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균형의 상태를 계속해서 조율해 가는 것이 삶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영화는 멜랑꼴리 하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생은 혼자 추는 춤이고, 낱말 맞추기를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니 너(나)도 삶의 불균형에 기꺼이 기우뚱거리되 유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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