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계 May 15. 2020

나는 프락치였다

  20대,  나는 여대생들이 좋아하는 중저가 캐주얼웨어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의 신용사업부에서 근무하였다.  우리 부서엔 나를 포함한 여직원이 넷, 영업사원이 20여 명이었는데, 우리 회사의 옷을 좋아하는 여대생들로 인하여 제법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서울 시내 여대생들 사이에서 우리 회사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모기업인 섬유회사에서 직물을 짜는 어린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위장 취업을 한 여대생을 통해 밝혀졌는데, 여대생들 집단에서 섬유회사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보니 자회사인 캐주얼웨어 불매운동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에는 서울 시내 많은 대학생들이 위장 취업을 하고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법과 착취를 고발하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니 우리 부서장인 총무이사님이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가보니 총무과의 미스 박 언니도 와 있었다.  이사님은“오늘 종로5가 기독교 회관에서 불매운동을 하는 서울 시내 여대생들이 모인다는데, 두 사람이 거기에 참석해서 앞으로 진행될 시위 일정을 알아내어 보고해라, 그래야 회사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대학생도 아닌데 거기에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이사님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미스노야, 대학생들은 이마에 대학생이라고 써 있냐? 등짝에 대학생이라고 적고 다녀?”


  함께 서 있던 미스 박 언니가 피식 웃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녀와 함께 간다는 것에 다소 안심은 되었지만 프락치가 되라는 명령은 순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회사원이 되었지만 대학생인 남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 도시락을 싸주고 용돈을 챙겨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던 때였다.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도 명동 거리는 물론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당차게 일하던 시절이었는데, 유독 대학생들을 보면 주눅부터 들었고 출 퇴근 길 나의 패션은 한두 권의 책을 들어야 완성되었다. 이사님 말씀처럼 내 이마에 “나는 대학생이 아니요”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등짝에 "나는 회사원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대학생을 보면 열등감부터 가질 때였다.  그런 나에게 회사는 가짜 대학생이 되어 프락치 노릇을 하라니, 참으로 야속한 운명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처지로 나는 미스 박 언니와 함께 전철를 타고 종로5가로 갔다.  기독교 회관에 들어서자 안에는 이미 서울 시내 여대생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미스 박 언니는 태연해 보였지만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면서 마구 떨려왔다.  내 얼굴 어디에, 내 몸 어디에 대학생이 아니라는 표시가 있을 것만 같았다. 80년 대, 당시는 대학생들의 위장 취업도 많고, 가짜 대학생도 많을 때였지만 막상 프락치가 되고 보니 들키면 어떡하나, 나의 신분이 노출되면 어떡하나, 여간 떨리는 게 아니었다.


  여대생들과 마찬가지로 입구에서 붉은 띠를 받아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서울대학교 여학생회장이라고 기억되는 한 여학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여대생들과 함께 머리에 띠를 맨 나는 바닥에 앉아서 누군지도 모르는 옆 사람과 스크럼을 만들고 으쌰으쌰 구호를 외치며 여학생회장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현장에서 듣는 연설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그녀라고 확신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데, 어찌나 똑똑하던지 그날 나는 내 신분도 잊고 그녀의 연설에 푹 빠져들었다. 그날 내가 받은 지적 자극은 우물 안에서 잠자던 나를 깨우기에 충분할 만큼 충격이었다.


  군중들의 환호 속에 여학생회장의 연설이 끝나자 다른 여학생 몇몇이 소품을 -크림빵도 있었다- 가지고 나와 연극을 시작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 생활을 하는 어린 여자 아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연극이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부모님을 돕고 공부하는 오빠 학자금을 보태느라 졸린 눈을 비비며 야근을 했다.  배고픔을 참아가며 밤을 새워 일하는 아이들에게 공장장은 빨리 일하라며 다그쳤고 배고프다고 하면 빵 하나씩 던져주며 생색을 냈다.  졸음과 배고픔 속에 공장장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며 일하는 아이들의 삶을 다룬 연극은 내 생애 처음 본 연극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연극을 마친 시위대는 구로1공단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 시위대를 막기 위해 회사에서는 바리게이트를 치고 각목을 준비할 터였다.  나는 기독교회관 1층 벽에 붙어있는 공중전화에서 이사님께 전화를 했다.  보고는 나의 임무였으니까.


  “이사님, 진짜 그랬어요?  섬유회사에서 일하는 아이들 노동력을 착취 했냐고요?  어린 애들을 잠도 안 재우고 일을 시키고, 배고프다고 하면 빵 하나 던져주고 생색내고, 빨리 일하라고 욕하고 닦달했다면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나는 왜 왔는지, 무엇하러 왔는지, 신분도 잊고 마구 항의했다.  회사가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따지는 나에게 이사님은  “야, 미스 노, 너 빨리 들어와.  거기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라고!” 하셨다.


  당시 나는 공장 노동자들이 불쌍하여 울었으나 돌이켜 보면 그런 노동자들이 많았고 사무직에서 일했던 나 역시도 그들 못지않게 불평등을 겪어야 했다. 업무량이나 중요도에 관계없이 대졸 사원과 고졸사원의 임금격차는 심각했고, 여상은 나왔으나 어린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아버지를 도와서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일이 많아 늦게까지 남아 일해도 수당 한 푼도 없던 때, 나 개인에 대한 희망이나 꿈을 갖지 못하던 시절,  삶의 중심에는 오로지 가난한 부모님과 공부하는 동생들만 있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논밭에서 지문이 닳도록 일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에 찌든 부모의 삶에서 그렇게 학습된 건 아니었을까.


  연고전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패션의 거리 명동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골목골목은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며 응원가를 부르는 대학생들이 차지했고, 회사 유니폼을 입은 나는 사무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대학생들이 누리는 낭만과 자유과 열정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돌아보면 나의 20대는 가난이라는 가시울타리 안에서 주눅으로 똘똘 뭉쳐 빠져 나올 생각도 못하던 날들이었다.


  그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외치던 똑똑한 여대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도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까.  국가가 경제적 발전만을 추구할 때 공평한 분배를 외치던 지성인이었던 여대생들,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게 느껴지는 이즈음 자꾸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보다 앞서 간, 나보다 정의로웠던 그녀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프락치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던, 지적 충격을 던져주었던 세상에서 가장 똑똑했던 그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