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5장에서 아렌트는 행위 개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행위란 고유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 – 사적 이익 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독자적 가치를 지니는 활동 – 이기에 권력을 발생시킨다고 역설한다. 앞서 여러 장에 걸쳐 논의한 노동이나 작업과 달리 행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무엇’이 아닌 ‘누구’의 문제, 즉 개인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필요성을 넘어 ‘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고, 이로서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나를 기억되도록 하는 불멸성 획득의 과정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행위와 권력은 언제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나,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다. 책의 후반부인 5장에서 아렌트는 행위의 세 좌절과 행위로부터 통치를 통해 ‘도망치려는’(escape) 시도가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행위는 당연한 것이 아닌 인간의 실존적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아렌트는 전반적으로 인간 행위의 가능성, 더불어 행위의 좌절을 극복하도록 하는 용서와 약속, 공동의 선(common good)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드러낸다.
Action is, in fact, the one miracle-working faculty of man. (p.246)
아렌트는 5장 28절에서 행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도록 하는 세 가지 좌절(frustration)로서 예측불가능성(unpredictability), 환원불가능성(irreversibility), 저자의 익명성(anonymity of its authors)을 드는데, 복수성을 지닌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행위가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러한 특성이 과연 공적 공간 형성을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특성인지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서로 다른 인간들의 말과 행동을 섣불리 재단하기보다 이에 귀 기울이도록 할 것이다. 행위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은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 신중하고 섬세한 태도를 지니도록 할 것이다.
아렌트도 언급한 바와 같이 행위의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은 반드시 공적 공간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속과 용서를 통해 이로부터 오는 불안감을 해소한다면 공적 공간에서 도망치지 않고 고유의 존재로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한편, 익명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인간의 조건> 하에서 다루는 현대 사회의 익명성은 함께 살아가는 나와 다른 인간을 고유의 존재로 바라보기 어렵도록 만들며, 각 개인이 말과 행동의 권력을 떨어트려 복수성을 해치는 해악이다. 그런데 아렌트는 현대 사회가 심화시키는 익명성에 대해 경고하는 데에 비해 이에 대해 여타 두 가지 좌절에 대한 해결책과 같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5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익명성이 극대화된 현대 사회는 왜 공적 공간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지금의 현대 사회는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며 직접 보고 만질 수 없는 타인과도 말과 행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낼 수 있는 무대로서 소셜 미디어 공간은 아렌트의 공적 공간이 지니는 예측불가능성, 환원불가능성, 저자의 익명성을 모두 갖춘 공간으로서 정치와 행위의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다.
그럼에도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공적 공간으로서 지금의 양극화된 소셜 미디어 공간 및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담화를 진정한 ‘행위’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행동과 말이 진정한 내가 아니어서도 아니다.
결국 소셜 미디어와 같은 익명성의 공간, 즉 현대사회에서 행위가 어려운 이유는 행위의 마지막 좌절인 익명성을 극복할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성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우리가 말과 행위를 하는지 모호해짐에 따라, 약속과 용서는 한층 더 어려워지며, 함께 살아가야 할 수많은 다양한 ‘타인’을 바라보기보다는 ‘적’과 ‘친구’로 인간을 구분하며 모호함을 탈출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즉, 익명의 공간에서도 ‘기적’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나, 실현되기는 어렵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익명성은 다원성의 적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해답이 부재한 상황에서 아렌트의 공동의 선(common sense)은 ‘기적’이 없는 한 우적구분과 같은 실존적 해결책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