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달달함이 필요하다. 피곤하거나 해결되지 않은 내 안의 증폭된 감정 둘 중 하나이다.
오늘 달달함을 끌어당긴 건 아마도 지나간 다시 오지 않을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9살 막내 등교를 시킨 후 집으로 가는 길에 모녀가 어린 두 아이 등원을 시키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된다.
엄마는 둘째 어린이집으로 할머니는 첫째 유치원으로 나뉘는 그 순간 둘째가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랑 가겠다며 떼를 쓰는 것이다.
왜 엄마가 아닌 할머니의 필요를 찾을까 잠시 의아했지만 아이들은 자기를 가장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이 누군지 너무도 분명하게 티를 낸다. 아마도 일하러 가야 하는 엄마보다 자신에게 품을 한 번이라도 더 내어주는 할머니가 더 간절했을 거다.
순간 우리 아이들 어릴 때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초중고가 되고 보니 부쩍 아이들 어린 시절이 자꾸만 올라온다. 엄마로서 짊어진 무게감 때문에 그저 힘들기만 했던 그 시절이 자꾸만 아쉬움으로 붙들린다.
주말부부로 아이셋을 혼자 케어 해야 했던 나로서는 당연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 일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상황으로 흡수한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큰애에 대한 짠함은 여전하다. 큰애 어릴 때 나이를 지나는 막내를 보면 그 짠함은 바닷물의 소금기처럼 나에게 쓰고 짠맛을 내어준다.
막내를 이뻐한 만큼 큰아이에게 사랑을 줬을까 싶고 그 아이는 그 시절의 기억이 어땠을까 싶을 땐 엄마로서 아찔하기까지 하다. 엄마로서 오롯이 내 몫을 견딘 만큼 큰아이로써 그 아이가 오롯이 짊어졌을 무게감이 분명 있었을 거다.
오늘의 달달함으로 그 짠맛을 중화시켜 보려 했는데 오히려 그 짠맛이 더 올라와 버린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짠맛을 더하는 건 큰애에 대한 애잔함일까?
그 시절 애처롭던 나의 무게감이 애도된 후에 자연스럽게 큰애가 짊어졌을 짠함이 올라온다. 15살 현재의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자꾸 어렸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널 많이 안아주고 사랑했을까? 그 시절의 엄마로서 내가 말이다.
볼 빨간 사춘기를 지나며 내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의구심마저 들게 한 순간도 있었지만 의젓함으로 자신의 색깔을 더해가는 큰아이를 보니 그저 감사하고 아이만의 길을 잘 개척하길 응원할 뿐이다.
이제 대놓고 안을 수도 없어서 가만 아이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엄마의 애정을 아이는 알까?
달달함이 필요한 건 짠맛을 중화시키거나 더 도드라지게 한다. 단짠단짠의 매력은 달달함만 가지고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짠맛이 있어야 달달함이 소중해지고 달달함을 찾게 되는 것이다. 짠맛이 오히려 달달함을 불러오는 것일 테니.
오늘 엄마의 달달함은 아이의 그 시절 짠맛과 어우러져 적당한 조화를 이루었다. 먹었더니 행복하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김애란/두근두근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