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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Dec 03. 2024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소설


 


        

이제 나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김애란 작가님의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서 마침 도서관에 있는 책을 빌려왔습니다. 제목도 내용도 전혀 알지 못하고 김애란 작가님 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한 <두근두근 내 인생>은 청소년 소설인가 싶은 마음도 들고 (초반에 청소년이 나오니깐요) 뒤로 갈수록 부모 관련 이야기인가 싶다가 어느새 주인공 아름이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리며 눈물이 맺힙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검색을 해보니 영화도 있어서 놀랬습니다.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아름이보다 아름이 부모가 가슴 아파서일 테지요. 저도 부모로 살아가고 있으니깐요.


17세의 소년이 팔십 세 신체로 살아간다는 걸 우리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제 나이 45세를 살면서도 45세에 맞게 신체가 노화하는 것도 저는 따라가질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말을 한꺼번에 배가 터지도록 먹은 아름이는 그 말이 소화가 되기도 전에 늙어버리는 자신의 몸을 매일 느껴야만 합니다. 천천히 알고 익히고 습득하며 살다가도 그 언어들의 무게에 체하기 일쑤인 평범한 신체를 가진 삶도 소화되지 못한 채 배설되어버리고 마는 언어가 천지인데 말이죠.


살아온 세월에 비해 너무 빨리 성숙해 버린 건 비단 아름이의 신체 노화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17세에 자신을 낳은 부모와 17세를 살아가는 아름이는 그렇게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성숙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부모가 된 아름이 부모와 너무 이르게 나이가 들어버리는 아름이게는 운명과도 같을까요?



지금도 드센 성격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말씨가 풀 죽은 듯 순해진 건
세상이 '시발'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인 듯하다.

방황하는 청소년기에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해 헤매던 한대수와 미라(아름이 부모)는 서로의 알지 못하는 답에 대한 같은 질문을 떠안고 있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 알아봄이 서로를 알아가게 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하게 하므로 아름이라는 결과물을 떠안게 되는 것이 그들이 알아간 결과일겁니다. 기꺼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한대수와 미라는 기특하면서도 대견하고 애잔하면서도 우직합니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무가 됨으로써 한 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두근두근 내 인생은 예비부모들이 꼭 읽어도 좋을 구절이 나옵니다.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닌 부모가 되었기에 어른이라는 진리 말입니다.


사랑의 결실로써 맺어진 열매를 잘 키워내는 것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른 해야 할 노릇과 해주어야 할 의무만이 가득한 부모 역할은 어른이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되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며 어른이 되고 아이를 키우며 마주하는 그 무수한 책임과 역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또 꿀며 자신을 굴복시킨 결과로써 온전히 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17살 한대수와 미라가 해냅니다. 평범한 아이어도 키우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하필 아이는 빨리 늙는 병에 걸렵니다. 부모보다 빨리 늙어버리는 아이를 키우는 건 어떤 심정일까요?




저는 마음보다 몸이 빨리 자라서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마음도 빨리빨리 키워놓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아마도 아름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 나이 17세가 되면서 더 두려웠을지도 몰라요. 부모가 나를 낳은 나이에 아름이는 이미 신체적으로 늙어버렸으니깐요. 노화되는 신체만큼 마음을 키워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며 아름이는 빨리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부모가 되어버린 자신의 부모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요?


중년에 나이에 접어들면서 신체와는 또 다른 마음에 가끔 한탄스러울 때가 있어요. 이 정도 나이면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부모다운 면모를 과시해야 하는 순간에도 불쑥 고개를 내미는 두려움에 나는 부모인데 이 정도에 무너지면 안 되지 하며 또는 왜 여전히 부모로서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지 못할까 싶은 순간도 여전히 마주합니다. 45세를 살아도 45세에 맞는 성숙은 글쎄요. 여전히 어른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할까요?


그런데 아름이는 17세이면서 80세를 살아갑니다. 여전히 철이 없고 여전히 아이 같을 17세의 나이에 80세의 노인으로 살아가는 아름이는 자꾸만 어른이 되어버리고 어른이 되어야 할 거 같고 어른이 되려고 합니다.




'나이는 몸으로만 먹는 게 아니니까'


철이 든다는 건 철을 겪었다는 말과도 같으니까
계절에 제법 물들어봤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일 년에 사계절을 몇 번이나 겪어야 철이 드는 걸까요? 철을 겪은 만큼 철이 들면 좋으련만. 몸뿐 아닌 마음도 나이 드는 아름이와 달리 우리는 마음이 몸만큼 자라진 않는 거 같아요. 아름이처럼 자신의 노화를 급속하게 느끼지 못함일까요? 노화되는 속도만큼 자기 마음의 속도도 LTE 급으로 해내는 아름이가 참 대견합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엄마가 또 다른 생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고 엄마 배를 만져보고자 했던 아름이가 저는 가장 슬펐습니다. 저라면 엄마가 미웠을 텐데 아름이는 자신 대신 동생을 두고 가게 되어서 다행이다 여겼나 봅니다. 역시나 마음이 웃자란 아름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아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한대수와 미라, 부모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아름이의 말로 풀어내는 한대수와 미라, 부모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애잔하고 슬픕니다. 자녀의 시선에서 바라본 부모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부모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니 말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나인 줄 알았는데
내가 나이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손을 타야 했던 걸까
내가 잠든 새 부모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가끔 놀라워

아이가 성장하며 성장통을 겪듯이 부모 역시 부모로서 자라기 위해 성장통을 겪습니다. 무수히 많은 선택과 책임 앞에서 자신보다 아이을 생각해야 했고 그 생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 속이 터지고 때론 속이 타는 순간도 겪습니다. 그 순간의 합은 자녀가 자랄수록 무너지고 무뎌진 마음으로 자녀를 받아들이게 되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몸만 어른인 나를 마음의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고 아이를 키워내는 건 또 다른 나를 키워내며 그렇게 나를 마주하게 되며 또 다른 나의 존재에 대한 위대함을 비로소 느끼게 되는 일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입니다. 훗날 그 위대함에 그저 감사와 경의로 나와 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


 그 위대함을 이미 17세라는 나이에 깨닫게 된 아름이는 그래서 엄마 뱃속에 새로운 존재를 기쁨으로 경의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여름을  간섭하는 여름이었다


아름이는 비소로 엄마가 엄마다운 삶을 살도록 엄마에게 와준 동생의 존재가 엄마가 엄마 일수 있게 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엄마로서 아름이의 보호자로서만 살았던 자신의 존재가 아닌 아이를 온전히 키우고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온전히 누릴 엄마로서 말이지요.


저는 끝까지 아름이가 아픕니다. 아름이의 성숙한 마음이 아름이의 마음이 빨리 늙어버리는 몸 때문에 두근두근 살아갔을 아름이의 마음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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