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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수니 May 20. 2021

10년만에 교수님을 뵈었다.

난임인 백수가 되어서 말이다. 정말 엉망진창이네.

대학교 교수님을 뵙고 왔다. 졸업한지 10년이 지났다. 주변에서는 대학교 교수님과 연락을 한다는것만으로도 신기해했다. 내가 전공수업을 한번 밖에 안들은 학생이었다고 말하면 더 놀라워한다. 돈독하지도 않은데 어찌 만나뵙게 되었냐면서 말이다. 교수님과 돈독했던 친구들 덕분이다. 스승의 날 근처에 뵈러 간다고 하길래 나도 숟가락을 얹었다. 내가 놀라운 것은 나의 용기다. 10년만에 얼굴 비치면서 백수로 인사 드리는 이 용기. 대학생때는 차라리 소속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해보였던 명함 한장 없이 뵈었다. (선물도 안들고 감)


어떻게 지내니?


교수님께서는 나의 안부를 물어보셨다. 나는 우주에 떠 있는것 같은 상황이라고 대답했다. 경제적으로는 코로나가 와서 10년간 다니던 여행사를 퇴사하였다. 회사를 다닐때는 나름 많은 경험을 한다고 했다. 디자이너였지만 프로세스 개선도 해보고 사내강사 활동도 해보고 공모전에서 동영상도 만들어서 상도 받아보고 했는데 막상 퇴사를 하고 보니 뚜렷한 것이 없어보였다. 흩어진 경험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사생활이 나랑 맞았던가. 아이가 생기면 경력은 어떻게 이어나가야할까. 고민만 가득한채 이직을 하는 것에 회의적이 되었다. 인생적으로는 아이와 함께 하지 않는 삶으로 기울어가는것 같다고 했다. 결혼을 할 당시만 해도 나는 아이를 원했고 남편은 반반이었다. 유산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소식이 없다. 나는 미지근하다. 익숙해진것인지 지친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 생각이 크게 들지 않는다. 지쳤다고 말하기도 민망한게 간절한 맘으로 백프로의 노력을 한적이 없었다. 병원도 가봐야겠다란 생각만 있지 실제로 가 볼 계획은 없다. 나만 돌보면 되는 이 상황이 은근히 편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다. 반대로 어느 방향이어도 괜찮다는 남편은 이제 분명히 아이를 원한다. 우리 부부의 의견은 합의가 안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몇달전만 하더라도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할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결정 내리지 않은채로 시간만 새어나가고 있다.방향을 몰라서 붕 뜬 기분이다. 지금 이렇게 내 상황을 적고보니 뭣도 없는데 거창히 말한것 같다. 짧고 명료하게 대답할걸 그랬다.

ⓒunsplash

"교수님~ 10년만에 뵈어요. 저는 엉망진창으로 지냅니다. 30대 중반인데 백수에 난임이라서요. "

다행히 교수님은 어떤 느낌인지 알것 같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짧고 굵은 응원의 말 대신 나의 상황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길고 굵게 해 주셨다. 일론 머스크보다 먼저 우주를 다녀왔다. 풀스토리를 담고 싶지만 나 역시 다 소화한게 아니라 간략하게 남긴다.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남기다보니 다소 교수님의 말씀과 달라진 부분이 있을것이다.



1. 30대는 자신의 방향을 수정해나가는 시간이다. 20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적응하는 시기라서 정신이 없다. 30대쯤 되면 이런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진실한 질문들을 던지며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는 때를 지금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2. 퍼즐 조각을 맞출때 우리에게는 완성된 사진이 있다. 자신만의 빅픽쳐가 있어야지 인생의 퍼즐을 맞추어 나갈 수 있다. 퍼즐 조각이 틀려도 어떤걸 맞추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다른걸 해보기도 하고 싫은 것도 참아 낼 수 있다. 


3. 빅픽쳐를 찾기 위해서는 결국 빅픽쳐를 그려보고 수정해 나가는 수 밖에 없다. 내 캐릭터를 여러개 만들고 그것들을 테스트 해 봐라. 그중에서 괜찮은 캐릭터를 살려서 빅픽쳐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의 패턴이 보일 것이다. 패턴을 알게 되면 내가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4.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하지만 사실 그걸 알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일이다. 그런것을 알 수 있고 찾을 수 있다고 현실을 부정하며 찾으려고 한다. 만약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거에 대한 확신이 생길 수 있을까? 작은 관념에 빠지면 더 큰 그림을 볼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5.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다. 세상은 날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내 중심인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봐라. 그리고 수용해라. 


6. 나에게 어떤일이 일어난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소화하는지가 중요하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일어난 것 자체에 포커싱을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포커싱을 해라.


7. 아이를 통해서 나를 보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반성하면서 겸손해진다. 내 인생을 복습하게 해주는 것이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하면서 얻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어릴때는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만 커가면서 부모를 키워주는 것이 아이들이다.


8. 나라는 사람을 알기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다른것을 보고 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는것처럼. 자식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을 알 수 있게 된다. 나에게 집중하는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만약 행복하다면 나는 단절 될수록 행복이라 느껴야 하는 것이다. 


9. 우리는 깨진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내 상태는 내 잘못이 아니다. 깨진 세상에 책임이 있다. 세상은 공평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실패한 것도 없다. 세상은 원래 뜻대로 되는 곳이 아니다. 중요한건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10.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자. 이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막다른 길에 있는건 잠시 멈춰야 하거나 다른길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막다른 길이 없다면 멈출 수도 방향을 바꿀 수도 없다. 


11. 돈도 중요하지만 그 외 삶의 가치를 내가 정해야한다. 내가 추구하면서 살 가치를 정해라.


12.  대부분의 시선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성인이 되어서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감정은

자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계가 깊다.



나에게 해주신 말 중에 힘내. 기운내. 잘 될거야. 같이 위로의 모습을 한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어떤 위로였는지 그려졌다. 손이 떠올랐다. 크고 따듯한 손이 나의 손을 덮어주는것 같았다. 나 자신조차도 날 이렇게 위로하지는 못했다. 헤어질때 교수님은 잘가란 말 대신 열심히 살라고 하셨다. 깊은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최대한 압축해서 해주셨다. 앞으로 대답을 찾아야 할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여운이 진하다. 목이 쉬어가시며 알려주신 교수님의 말씀 중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말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unsplash
항상 앞으로.

결국에는 내가 일어나길 바라셨으니깐.

이제 그만 일어나서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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