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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부 Apr 18. 2023

살림

 아이를 살게 하는 것  

삶이 허전하거나 외롭다고 느껴질 때면 나는 나의 오래된 기억들을 떠올려보곤 한다.

그 기억은, 겹겹이 쌓인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한 장 한 장 들추다 보면, 늘 아무런 단서도 없이 불쑥 등장하곤 하는데, 연고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는, 그러니까, 기억이라기 보단 감각에 가까운 원초적인 것들이다. 


어린 시절 온 얼굴이 시커메질 정도로 실컷 뛰어놀다 집에 들어오면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코 끝으로 퍼지던 향긋한 밥 냄새. 환하게 켜진 부엌 조명과 앞치마를 두른 엄마의 뒷모습. 팔팔 끓는 된장국물이라던가, 따뜻하게 날 부르던 엄마 목소리, 그런 것들. 


김장하던 날 아침이면 새벽부터 김장대야를 옮기고, 배추를 나르고 이리저리 바쁜 엄마와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 졸졸 야채 씻는 소리와 서걱서걱 무를 자르는 소리. 열린 베란다 문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움츠린 나의 몸을 감싸주던 보드라운 겨울 이불의 촉감,   


설핏 잠이 들었다 깬 무더운 여름밤, 새벽녘인지 초저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하늘에 벌컥 문을 열고 나오면 터덜터덜 돌아가던 거실 선풍기 소리와 벌려진 안방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따스한 불빛, 도란도란 들려오는 엄마아빠의 정겨운 목소리. 그리고 바깥에서 들려오던 여름의 소리들. 


그러니까, 나를 살아오게 한 것들도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설거지할 때 그릇끼리 부딪치며 나던 소리들, 세탁기가 돌아가며 내는 덜덜거리는 소음, 밥이 지어지는 냄새, 화장실에서 풍기던 희미한 락스 냄새. 옷에서 나는 향긋한 빨래 냄새. 그런 자질구레한 살림의 냄새가, 소리가, 누군가 나를 보살피고 돌봐주고 있구나, 안심하던 저릿한 감각이,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의 아주 밑바닥에 단단하게 자리 잡아 다른 기억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고 있던 것 같다.


그러니 '살림'이겠지. 아이를 살려내서, 살아가게 해서, 살림인 것이겠지.  


아마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모든 아이들은 그런 기억을 심고 자랄 것이다. 그 기억은 진하고 텁텁하여 쉬이 향이 날아가지 않으며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고 떠올려질 정도로 오래도록 반복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플 때도, 혼자가 되어 외로울 때도, 용기가 나지 않는 모든 순간에도, 언제나 따뜻한 보살핌의 기억이 나의 편이 되어준다. 나를 북돋아 준다.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그 기억을 물려받은 누군가도 또다시 다음 세대에 또 다른 형태의 소리와, 색과, 감각을 전해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부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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