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국과 나이, 그리고 시간
설 떡국을 먹었다. 김이 포르르 올라오는 떡국 국물에 뽀얀 떡이 한가득이었다. 고명으로 올라간 파와 계란 지단, 김가루가 떡 한 접시를 다 덮고도 남았다. 육수가 진하게 우러나온 국물을 살짝 맛보고, 떡을 한입 베어 물었다. 쫄깃한 떡이 치아에 착 달라붙었다 ㅡ 떨어졌다 하며 찰진 식감을 자랑했다. 한 입, 두 입 떡을 먹으며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나이를 먹었다.
나이를 먹는다라. 어른들 말씀에, 떡국을 먹어야만 비로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나이는 들기도 하고 많아지기도 하는데 왜 먹는다고 표현할까. 나이 드는 게 딱히 좋은 일도 아니련만, 왜 굳이 떡국까지 먹어가며 내 몸 안에 세월을 집어삼키는 것이냐 말이다.
언젠가 시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시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크로노스적 시간,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적 시간. 맞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크로노스가.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티탄 신. 아들이 자신의 권력을 빼앗을까 봐 미리 잡아먹은, 그러나 종국에는 그 아들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마는(그 아들이 제우스다) 이 세계 모든 부자 갈등의 원형과 같은 신. 그 원초적 욕망의 화신이 다른 의미로는 '절대적 시간'을 상징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크로노스적 시간이라 함은 물리적, 절대적 시간으로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과 같이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일관적으로 흐르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적 시간은 상대적 시간으로, 내가 시간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구성되는, 한마디로 인간의 주관적, 질적 경험에 기초한 시간이다. 크로노스적 시간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면 카이로스적 시간은 때에 따라 내 편이 될 수도 남의 편이 될 수도 있다. 크로노스적 시간이 가차 없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카이로스적 시간 안에서 우리는 찰나가 영원이 되거나, 영겁이 1초와 같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먹은 떡은 크로노스적 시간일까, 카이로스적 시간일까. 음력 1월 1일, 떡국을 먹으며 의지와 관계없는 한 살을 더 먹어버렸으니 카이로스보다는 크로노스적 시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구글에 크로노스 사진만 검색해 봐도 알겠지만, 크로노스는 못생긴 얼굴과 더불어 잔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대개의 그리스 로마 신들이 잔인한 존재였다지만, 핏덩이 어린 아들을 집어삼키는 일은 웬만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사실 시간이란 것이 그렇다. 시간은 원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크로노스가 시간의 상징이 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렇게 떡국으로 고아서, 내 목으로 무심코 넘겨버릴 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기도 하다.
이런 추측도 해볼 수 있겠다. 무자비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떡을 먹으며 저항하는 것이다. 시간이 우리를 새빨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는 동안, 인간 역시 가만있지 않고 역으로 시간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크로노스가 엄중한 칼날로 우리 모두의 세월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동안, 누군가는 카이로스의 비호를 받아 분배받은 시간을 더 지혜롭고 의미 있게 사용하며 시간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집어 먹은 떡은 카이로스적 시간이리라.
먹은 떡이 크로노스인지, 카이로스인지는 순전히 먹는 당사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떡을 먹고, 그곳에서 나오는 영양분으로 다른 이의 자양분이 될 일인지, 아니면 그저 배설물로 흘려보낼지는 말이다.
구글링을 아무리 해봐도 카이로스의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에 관한 설명도 딱히 없고 에피소드도 전무했다. 아마 카이로스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여서인 듯싶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절묘한 기회가 될 수도 핑계 아닌 핑계, 중요한 패착 요인이 될 수도 있어서인가? 두 얼굴을 가졌다기 보단 얼굴이 없다는 편에 가깝겠다.
나이를 먹는다. 처음과는 달리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문장이다. 뜨끈한 떡국 한 접시를 먹으며 나이를 먹는 의미를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