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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맵다 쓰다 Nov 07. 2022

기특한 발견


"모. 든. 사람이 꼭 루틴을 가져야 할까? "

내게 묻는다면 "글쎄..."라고 대답할 것 같다.


시험문제의 예제도 모두, 반드시,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 오답이 많았던 걸 보면 절대 진리는 없을 것 같다. (답을 모를 때는 그런 문장의 번호는 제치고 본다. ㅎ)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확실과 불확실의 경계에 마음이 가있다.

이 정도면 도저히 루틴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내게 없는 그것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들어맞는 방법은 애초에 없을 테니까. 지금처럼 살아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면서   계획적인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또 그려본다.

그런 계획들을 내가 실현할 수 있다는 착각에도 자주 빠진다.


기말고사 날짜와 범위가 나오면 시험 준비는 디데이와 함께 시작한다. 오늘부터 시험날까지의 일수를 세고, 그 옆에 디데이 몇 일인지 빨간 펜으로 적어 넣는다.

두 개의 숫자를 가진 날짜 옆에  공부할 과목과 분량을 분배한다. 전체 과목의 숫자와 시험분위 분량을 따져  남은 일수를 나눈다.


너무 의욕에 차서 계획을 세워서일까?곧 집중력은 흐려지고 급 피로가 몰려온다.

이삼일은 어찌어찌 계획의 분량을 해내다가 며칠이 안되어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러면  계획수정이다.

 남은 날짜와 아직 해결안 된 과목의 숫자로 나눠서 수첩 다음 장에 계획이 만들어진다.


숱한 계획과 어그러짐을 겪으며  나는 자랐다. 계획과 준비성도 유전으로 전달된다면  열성인자 가지고 태어난 게 틀림없다고 느낄 만큼 허술한 어린이와 청소년이었다.세 살 버릇 여든간다는 말처럼  마흔이 넘도록  계획성 없는 어른으로 살고있다.


기린이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기위해 목이 길어지는 것처럼  환경에 생존하는 건 동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계획된대로 차근히  준비된 상태가 아닐 때는 실수나  돌발상황을 자주 야기한다. 잦은  돌발상황  노출은   임기응변력을 강화해서 생존하게 한다. 그렇게 획득한 잔머리와 눈치로 나름 무탈하게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인간은 변한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싶다.


원시인이 수렵이나 채집을 그만두고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어서 농경사회로 들어가 예측 가능한 수확과 삶을 살고 싶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더  가지고 싶어 했다.

'계획성'이라는 그놈을..

요즘에는 '루틴'이라고 부르는데 몇 년간 그놈을 집요하게 쫒고 놓치면서 그토록 잡고 싶은 이유를 알아냈다.


루틴을 가지고 싶은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뭘 많이 하고 싶다. 다양하게 하고 싶고, 많이 하고 싶고, 잘하고 싶다."


그러려면 시간을 계획적으로 써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나는 하고재비 형 (뭐든 하고 싶어 하는 유형이라는 방언)이면서  대체로 게으르다. 아니, 대책 없이 게으르다는 게 정확하다.

지긍은  이럴 때가 아닌데 하면서 게으름을 피운다.

 

자주 뜨거운 열정으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가 어딘가 미세한 구멍이 생긴 풍선처럼 빠지고 있다는 의식도 할 수 없이 서서히 바람이 빠진다.

"빵"하고 소리를 내면서 터지면 여기서부터 끝, 이제 새로 시작! 이런 구분이라도 가는데 이건 언제 그 마음이 작아진 거지? 뒤늦게 의문이 든다.

바람이 빠진 풍선의 탄성 잃은 쭈굴거림처럼 나의  자아상도 쭈굴거린다.

'어이구, 마음을 먹지 말지 그랬니? 네가 또 그렇지. 그래!'


집요한 루틴과의 추격전으로 알게 된 기특한 발견이 있다.

내가 시작을 즐기는 편이란 거다.

이게 무슨 작심삼일의 고급 표현인가 싶겠지만 '작심사일= 작심 일일 '이라는 걸 감정적으로 수용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 별거 아닌 수용은 자신을 조금 나아보이게 만들어준다.

'자주 결심을 못 지키는 사람'보다는 '자주 시작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 훨씬 근사하니까.


그런 발견은 자신에게 일말의 여유를 선사하기도 한다.게으름을 여유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일으킨다.

비록 며칠 동안은 굳은 다짐을 못 본척하면서 소파 위를 뒹굴고,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않지만 내일은 또 작심 일일을 시작하리라는 믿음을 만든다.


스스로 '자아'를 구겨버려도 '대기조 믿음'이 슬며시 나타나서 구김을 펴준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 아니라 '오늘까지만 놀자'로 감정의 간극을 줄여준다. 루틴 실패의 회복탄력성을 높인다. 

고작 결심하나 흐트러지는 게 회복탄력성을 운운할 만큼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일 맞다. 그런 고작. 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사소하게 느껴지는 나에 대한 모습, 경험, 느낌이 '자아'를 만든다.


그래서 기특한 발견을 해내고 난 뒤, 무너진 블록을 다시 빠르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계획과 실천이라는 두 단어로 측정되지 못하는 감정과 현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허무맹랑한 믿음이 뻔뻔하게 '게으른 자기계발러'라고 소개할 용기를 주나 보다.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게 정신병 초기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아저씨가 보기에는 우리같은 범인( 凡人)의 생각이 이해가 안되겠지만  지금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도 마음만은 행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제정신으로만 살기에는 삶이 너무 퍽퍽하니까 살짝 미쳤단 말을 듣더라도 원대한 상상정도는 하면서 살고 싶다.


숨 쉬듯이 결심하지만 늘 무너진다.

노력에 비해서 성공하고 싶다.

대체로 게으르지만 꽂히면 부지런하다.

참 한심하다가도 가끔 기특하기도 하다.


지금은 별 거 안하며 살아도 죽기 전에 한 번 별거있게 살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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