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지 Lizzy Jul 03. 2020

잠자던 AI스피커를 쓰기 시작했다

핵심 요약 : 오랜만에 써본 AI스피커는 음성 인식률이 괜찮아졌고, 라디오 기능이 되어서 엄마가 아주 잘 쓰신다! 


1.

한창 당근마켓을 통해 집에서 자고 있는 '나는 안 쓰지만 멀쩡하게 작동하는' 물건을 찾아보던 5월. 책장 한 구석에 있던 SKT의 AI스피커 '누구(NUGU) 미니'를 찾았다. 당근 마켓에 검색해보니 5천 원에서 잘하면 만원 정도에 팔리는 것 같았고, 난 이걸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은 것 같았기에 그 정도 가격이면 만족스럽게 팔 수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물건이기에 작동이 잘되나 싶어 충전을 다시 하고 앱을 깔아 연결해보려 했다. 과거에 집안 와이파이에 연결했던 적이 있는지, '누구'는 오랜만에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가졌던 AI스피커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게. 

"어라? AI스피커가 이렇게 편리한 놈이 아니었는데?"


2.

아마존에서 만든 '에코(Echo)'가 시장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AI스피커는 국내 IT 대기업들이 눈독 들이는 신규 사업이었다. SKT에서 2016년 하반기에 '누구'를 런칭하면서 스타트를 치고 나갔고, 다른 이동통신사도 비슷한 느낌의 AI스피커를 판매했다. 카카오에서는 2017년에 '카카오 미니'를 런칭하면서 카카오프렌즈 피규어와 함께 열심히 판매했다. 

회사들은 제품 자체를 팔아서 큰 이윤을 남기기보다 자사의 인공지능 서비스를 플랫폼화하는 과정의 미끼로 이용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온갖 끼워 팔기 전략을 도입하며 낮은 가격에 기기를 보급했다. SKT에서는 '누구' 반값 할인을 거의 상시 진행했고, 보급형으로 만든 '누구 미니'는 신규 가입 선물로 무료 증정했다. 카카오에서는 귀여운 피규어는 물론, 멜론 무료 구독 서비스와 함께 가열차게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하지만 한참 4차 산업 혁명 어쩌고와 함께 핫하게 조명되다가 어느 순간 찬밥이 된 3D 프린터와 비슷하게, AI 스피커의 인기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당근 마켓에 '누구'를 팔기 위해 요즘은 정가에 얼마나 파는지 검색해봤는데, 판매처 자체가 별로 없어 보였다. 최근에는 구글에서 유튜브 레드 구독자를 대상으로 무료로 '구글 홈 미니'를 뿌렸다. AI스피커가 출시된지 몇 년이 지났지만, 무료 사은품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3.

UX리서처로 일하던 2014~2017년 중에 나는 회사 업무와 관련해 AI스피커를 사용할 일이 있었다. 진짜 유저로서 사용했다기보다는 업무의 연장선에서 제품이 기능할 매력적인 상황(Context)을 찾기 위한 목적이었다. 2016년에는 어린이 영어교육을 위한 AI 개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아마존 '에코'를 활용해 영어 회화 연습이 가능한지 실험해보기도 했다. SKT에서 '누구'를 런칭했을 때는, 호기심을 담아 아빠 생신에 선물해보기도 했다. 

'에코'는 국내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처음에 와이파이 연결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누구'는 초기에 도입되었을 때 음성 인식률이 형편없었다.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 또렷하게 말해야 겨우 알아들었다. 한마디로 멍청한 수준이었는데, 부모님은 기계를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발음이 부정확한 것을 탓했다. 잘 못 알아들어도 이런 기계가 있다는 걸 신기하게 느끼셨다. 하지만 사용하기가 불편하니 자연스럽게 관상용 스피커로 전락했다. 아빠는 어떤 이유에선지 가끔 사용해보려 하신 것 같지만, 오랫동안 잠자던 스피커는 스위치를 누른다고 바로 작동을 시작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아마 아빠는 스피커를 깨우기 위한 호출어(wake-up word)인 "아리아"를 기억하지 못하셨을 것 같다.


4.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AI스피커에 실망해봤기 때문에 싼값에라도 팔려고 했던 '누구 미니'를 팔기는 커녕 거의 매일 실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당근 마켓에서 '카카오 미니' 중고를 만원에 사서 엄마 집에 한대 놔드렸다.

(아빠께 사드렸던 '누구'는 아빠 회사 사무실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5.

- 약 3년 만에 사용해본 AI스피커는 부드러운 와이파이 연결은 물론, 음성 인식 능력도 확연히 좋아진 게 느껴졌다. 주 사용 기능인 음악 재생을 명령할 때, '이건 못 알아듣겠지' 싶을 법한 가수의 이름이나 노래 제목도 알아듣고 척척 재생하는 걸 보면서 기술의 발전을 느꼈다. 

- 다른 블루투스 스피커에 비해 배터리 소모가 너무 빨라서 하루만 지나도 죽어버려서 불편했는데, 이제는 항시 충전 상태로 사용한다. 이를 고려해서인지 '카카오 미니'는 애초에 충전 어댑터와 함께 판매했다.

- 붙박이가 되다 보니 어떤 장소에 놓아둘지 고민을 좀 했는데, 약간의 고민 끝에 부엌에 뒀다. 음악 재생 외에도 요리를 하다가 타이머 기능이 필요할 때 "아리아, 10분 뒤 알람" 등의 기능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

- 집에 음질이 더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지만, AI스피커는 휴대폰과 연결할 필요 없이 독립적으로 음악을 재생한다는 장점이 있다. 블루투스로 연결해 음악을 듣다가 전화가 왔을 때 블루투스 연결을 해제하는 게 종종 불편했기 때문이다. 

- 음악을 재생할 때 앱으로 재생하는 것보다 편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특정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싶을 때, 멜론에서라면 1) 가수를 검색한 뒤 2) 노래들을 재생목록에 추가하고 3) 재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내 플레이리스트가 누덕누덕해진다. 나는 좋아하는 음악만 플레이스트에 있길 바라는데! AI스피커를 이용해 재생하면 플레이리스트 추가가 필요 없다(내가 모를뿐 멜론에 이런 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상황별 음악 재생도 편리하다. "신나는 음악 틀어줘" "인기 있는 노래 틀어줘" "위로되는 음악 틀어줘" 등등. 멜론 앱에서도 이런 플레이리스트를 찾을 수 있지만, 브라우징하는 과정 없이 생각나는 대로 명령하고 재생되는 게 꽤 편리하다. 


6.

엄마께도 놔드린 이유는 라디오 재생 기능 때문이었다. 라디오가 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아주 선명한 음질로 재생되는 걸 발견하고는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한 달에 방송국 문자 비용으로만 만원 정도(한 통에 50~100원)를 지출하시는 라디오 열혈 팬이신데, 그러다 보니 CD도 안 들으시면서 부피가 큰 오디오를 항상 두고 사셨다. 스마트폰을 구매하시고는 각 방송사의 라디오 앱을 다운받아서 들으시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소리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집에서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느낌이었다. 라디오 기능을 겸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드린 적도 있지만, 세팅하는 거나 채널 바꾸는 걸 너무 불편해하셨다. 라디오 특유의 지지직 거리는 음질 문제도 있었다. 

AI스피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최적의 조합이었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라디오를 재생하기 때문에 오디오에 비해 선명하게 재생되었고, 채널을 변경하는 것도 쉬었다. 주파수 조정이 전혀 필요 없고, "헤이 카카오, CBS 라디오 틀어줘" "헤이 카카오, KBS 라디오 틀어줘"라고 말만 하면 된다. 처음에 엄마는 "헤이 카카오"라는 호출어를 기억하기 어려워 메모를 해두셨지만, 익숙해진 이후에는 편하게 잘 활용하신다. 조카를 돌보기 위해 자주 가시는 오빠네 집에도 '카카오 미니'가 있는 걸 발견하시고는 거기서도 라디오를 듣는다고 하신다. 오빠가 이 기능을 진작에 알려줬으면 좋았겠다고 툴툴거리기까지 하셨다. 아마 오빠는 AI스피커가 라디오도 재생한다는 걸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7.

- 의외의 발견처럼 한 달 넘게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AI스피커이지만, 아직은 신기술처럼 느껴지긴 한다. 음성을 통해 명령하는 게 편리한 상황도 있지만 불편한 상황도 존재한다. 남편은 종종 내가 '누구'한테 하는 말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툴툴댄다. 아파트라는 맥락을 생각하면 한밤중에 사용하기는 어렵다. 

- 간단한 명령을 위해 목소리를 쓰는 게 과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그렇게 느끼는 부분은 볼륨 조정 기능인데, 내가 원하는 소리 크기를 찾을 때까지 여러 번 "아리아, 소리 줄여"를 반복하다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볼륨 7에 맞춰줘"같이 쓸 수도 있는데, 좀 어렵게 느껴진다) 

- 그래도 요즘 AI스피커를 즐겁게 사용하시는 엄마를 보다 보면, 많은 '스마트~', '로봇~' 류의 제품이 그러했듯, 아직은 걸음마 단계의 기기에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아직은 '인공지능'이라기보다는 '음성 인식'정도의 역할을 할 뿐인데 말이다. 개선된 음성인식과 1~2가지 유용한 기능만으로도 AI스피커는 '써보니 별거 없던 핫템'에서 '생각보다 쓸만한 꿀템'으로 느껴진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