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알고 지내는 임 소장님(건축가)이 성북동에 짓고 있는 주택 현장을 갔다. 성북동이라는 말에 맘은 한껏 신났다. ‘우리도 이제 부자 동네에 한 건 하는구나!’ 헛물을 켜고 도착한 그곳은 건축이 7평, 그 앞 장방형 마당도 무려 7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게다가 건축주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은 꿈에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 집을 짓고 있단다. 그 큰 꿈을 이루어야 하는, 작은 규모와 커다란 꿈은 서로 반비례이거늘. 예산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 그럼 어떻게...? 소장님과 고민을 시작했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 특히 성북동 언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들을 써보면 어떻겠냐하셨다. 경비도 아끼면서 자신이 계획한 집이 들풀처럼 자라는 집이었으면 좋겠다하셨다. 과연 될까 머뭇머뭇했지만 현장을 나서며 마주한 성북동 오래된 담장 틈으로 자라는 고들빼기며 민들레를 보는 순간 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성북동의 봄, 여름, 가을은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생명의 숨결은 잔잔히 이어지고. 이런 과정을 집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 것이다. 다른 시선으로.
들풀(잡초)들을 심었다. 대부분의 식물을 흔히 보아왔지만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로 심었다. 알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어떻게 변해 갈지 알 수 없지만...
질경이, 벌노랑이, 돌나물, 괭이밥. 전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들을 구출한 것이다. 생태적으로 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날 성북동의 답답한 공기사이에서 나비를 만났다.
#2 두 번째 대화
한국 최고의 조경설계사무소에 다니는 친구가 사무실에 놀러 왔다. 파주 근처에 지어지는 건물의 중정에 식재공사를 하고 있다며 공사 중 모습을 보여 준다. 강원도에서 멋지게 자란 R20의 낙엽교목을 이식하는 이미지였다. 부러웠다. 우리가 만들 정원의 총공사비로 ‘저 나무 한 주 밖에 못 사겠네’라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에 에둘러 흠집을 막 잡았다. 물론 속으로만. 그 땅에서 힘겹게 자리 잡고 뿌리내려 잘 살고 있는 나무를 옮겨오기 위해 뿌리에 온통 칼질을 해서 바싹 묶고는 먼 길을 싣고 와서 낯선 땅, 그것도 콘크리트 바닥 위에 심는 게 마땅한 일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우리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몹쓸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3 세 번째 대화
명륜동의 다가구주택을 직접 수리해서 살고 계시는 김 소장님(건축가이자 집주인)을 댁에서 뵐 수 있었다. 뒷마당에는 산의 바위가 그대로 내려와굳건히 자리하고 있었고 마당 한편으로 전통의 정자를 재해석한 듯 사각형의 목재 파고라가 있는 단단한 집이었다. 원래 있었던 큰 살구나무와 새로 심은 작은 교목과 관목 몇 개가 식물의 전부였고 텃밭을 작게 일구고 있었으며 필요한 경관을 위해 때마다 초화 종류는 몇 개를 직접 사서 심어서 가꾼 그런 정원이었다. 이렇게 말했다. 많이 채워서 풍족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닌 직접 바라보고 사용하는 사람의 시선이 제일 중요하다고. 유심히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삶의 태도가 중요할 것이라 했다. 그랬다. 그곳은 대부분 비어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잡초들이 살아갈 터전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길러져 세상에 나오면 제자리를 잡지 못해 반은 죽게 되는 그런 화초들이 아닌, 오랜 세월 그곳에서 터를 잡고 힘차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식물들의 세상이었다. 결국 ‘사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 명륜동의 끝자락에서 내려오는 내내 태도를 생각했다.
#4 네 번째 대화
25년의 인연이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송 대표님을 만나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천안에서 식물원을 하시며 식물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하신 분이다. ‘왜 비닐하우스에서 식물을 키우고 여러 가지 다양한 품종을 개발하느냐? 그냥 단순하게 잘 버티고 오래 사는 식물로만 경관을 만들면 문제가 있냐?’라는 거침없이 무식하고 무지로 똘똘 뭉친 저급의 질문을 던졌다.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식물은 가만히 있다. 다 인간이 조건을 거는 것이다. 이쁜꽃을 원하다 보니 더 화려한 품종을 개발하게 되는 것이고 오래 살려두며 감상하고자 하니 더 저항성이 있는 수종을 개발하는 것이다. 식물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는 일인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식물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라는 멋진 답을 주셨다. 그렇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그 태도인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태도에 대한 생각의 고리는 연결되었다.
이미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겼지만 생명의 연속성만은 계속되고 또 시간이 그려낸 저 디자인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오직 자연만이...
#5 다섯 번째 대화
교보에서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책을 샀다. 작년 9월에 나온 ‘도시에서, 잡초’라는 책이다. 길가에 흔한 풀들에 관심을 가지고 가볍지만 묵직하게 생각할 바를 전해주는 책이다. 잡초가 도시에서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훌륭한 방법들을 소개도 하고, 그들이 도시에서 하는 순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잡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잡초라는 것은 식물학적 분류가 아니며 보는 사람에 따라 잡초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면서 ‘바라지 않는 곳에 자라는 식물’이라는 정의처럼 사람에게 훼방, 즉 농작물의 생육에 영향을 주는 그 순간 천덕꾸러기가 되어 잡초로 전락하게 되고 제거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네 정원에서는 우리 시선만 바꾼다면 어렵게 멀리서 나무를 가져오지 않아도 되고 힘들게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서 바깥세상으로 내보내 죽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푸른 정원을 꾸밀 수 있지 않을까. 주변에 많이 있고 심지어 꽃도 아름다워 관상의 가치가 높은 것들이 많다. 그 특유의 번식력 또한 대단해서 그 무자비한 퍼짐을 빗대어 ‘뿌리로 달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소결
곧 터파기가 진행되어 땅 위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땅이 있다. 그곳에 현장조사를 가면서 혹시 캘 수 있는 잡초라도 있을까 해서 삽과 식물 담을 상자를 차에 실었다. 질경이도 있었고 서양민들레, 애기똥풀, 끈끈이대나물, 돌나물, 긴병꽃풀, 괭이밥 등 그 모양과 꽃, 질감이 서로 다르고 잎도 아름다운 푸른 식물들이 지천에 있었다. 평소처럼 내용도 모른 채 물가정보지에서 선택하고 농장의 비닐하우스에서 찾았던 식물이 아닌. 그런 것들을 옮겨 심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주기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나 또한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바닥 돌 틈으로 잡초가 보인다 아니 들풀이. 어렵게 잔디를 심지 않아도 기다리고 또 다르게 볼 줄 아는 여유만 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거닐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