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할 것을 요구받는다. 아주 노골적으로. 새롭지 않으면 늘 뒤처진 낡은 것을 하고 있다는 오해를 한다. 심지어 능력 부족이라는 오명과 함께 지켜온 자리마저 위협받는다. 겪었고 지금도 횡횡한 경쟁시대의 현실이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성경의 한 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이런 나에게 혹은 비슷한 우리들에게 새로움을 강요하는 지금의 분위기는 참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나날이다. 조경은 살아있어 늘 변화롭고 변화 로운 재료인 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독특한 분야의 하나이다. 입이 아프고 귀가 따갑게 듣고 말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늘 새롭게 변하는 소재로 계획하고 만들고 있는 우리에게 강요하는 새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말(보고서)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아름답게 변하는 경관중심의 공간을 계획했다고 하곤 막상 만들고 나면변화는커녕 낡아빠진 형형색색의 시설물로 가득 찬 공간을 보여주었기에 사람들이 우리의 거짓말을 알아채버린 것일까.
나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다. 과연 소재를 많이 알고 있고 그 구법에 능통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그게 왜 굳이 필요한가? 등 뻔하지만 답도 없는 생각으로 머리만 바쁘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이렇다. 좋은 공간적 ‘톤(tone)’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톤’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본래는 음악 용어로 어떤 일정한 결합 관계를 가진 몇 개의 음이 융합되어 만드는 음조를 말한다. 회화에서는 개개의 색채가 명암, 농담의 차이에 따라 형성하는 조화를 말한다”라고 나온다. 색의 명암, 강약, 농담 등이 나타내는 미묘한 차이와 그 혼합으로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변화를 말하는 것일 게다. 우리가 조경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선정하고 조합해서 장소를 만들면 제일 먼저 반응하게 되는 기관은 아마 오감 중 시각에 의한 인지가 될 것이다. 이때 그 장소가 가지는 고유한 경관의 분위기를 눈으로 보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의 하나로 ‘톤이 좋은 공간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경관의 ‘톤’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재료들의 상관관계를 고려해서 조화롭게 만든다면 좋은 ‘톤’의 공간이 지닌 아우라를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소재를 더 연구하고 그 연결방법을 궁구 하는 것은 아닐는지.
잎이 바람에 뒤집히며 빛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시시각각 바뀌는 미묘하고 경이한 tone의 변화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다루는 재료 중 일부러 어렵게 많은 처리를 하지 않아도 자유자재로 제 모습을 바꾸어 다양한 ‘톤’을 만들어 내는 재료가 있다. 나무다. 하루 중 태양고도의 방위각에 따라 잎사귀 앞뒷면의 반짝임과 색상이 달라지고 열매에 부딪치는 빛의 반사에 따라 질감이 변한다. 매 달마다 잎의 부피가 달라져서 양감이 변하고 색이 변해서 그 다양함이 절정을 이룬다. 외부조건과 쉽게 반응하기도 하는데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삐 움직이니 그 수많은 ‘톤’의 변화는 마치 마술과도 같다. 이런 개개의 톤이 변하는 모습들이 전체를 이루며 나타날 때 조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독특한 ‘경관의 톤’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단 몇 개의 소재로 이처럼 무궁무진한 톤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야가 또 있을까.
3월부터 그다음 해 4월까지의 변화를 기록하였다. 객체마다 변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덩어리로 보여서 그 변화들의 ‘톤’이 결정되었다. 일단 내 눈에는.
2년 전 이십여 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시급했던 일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지?’였다. 어떻게 해야 일을 잘할 수 있고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내린 두 개의 결론은 늘 해왔던 대로 쉼 없는 야근을 지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식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식재 도면을 그리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 오래 버틸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서 식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공부하기 위해서 한 장소를 정했고 일주일에 하루 그곳에서 몇 시간을 보내며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택했다.
부분이 먼저인지 전체가 우선되어야 할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단정할 수 없기에 우선 시작부터 해야 한다라는 마음이다. 미묘한 변화의 ‘톤’을 따라가는 일.
이년이 흘렀고 내가 그곳에서 배운 것은 처음의 생각처럼 식물 개개의 상태와 변하는 모습을 알고 설계에 적용시키겠다는 단순한 접근의 무식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곳의 변화하는 모습들은 도면에서 그려진 하나하나의 동그라미 안 녹색덩어리들처럼 낱개로 움직이지 않았고 전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미묘한 ‘톤’의 변화를 가지고 있었다.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 많은 식물들을 다 외울 수도 없고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들을 식물 원예학자들처럼 잘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할 일은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마술과 같은 ‘톤’의 변화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만드는 공간 안에서 아름다운 ‘톤’들이 마술처럼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도면을 그리고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나는 성공했고 하나는 진행 중이다. 먹고살기 위해 끝없는 야근을 자유형으로 직진을 하고 있고 식물은 너무 어렵다.
우리의 주변 일상에는 수없이 많은 미묘하고 아름다운 ‘톤’의 변화가 있다. 그 미시적인 차이들을 세심하고 주의 깊게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우연찮게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발주처에서 날아오는 전화에는 작업을 좀 더 신선하게 잘할 수 없냐는 분노로 가득하다. 지금 적고 있는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내가 그리고 있는 이 나무들이 이처럼 변화무상한 존재이니 더 새로운 것은 요구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은 내게 어떤 돌을 던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