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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Oct 07. 2023

불순한 지식과 질척이는 유대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대학 입시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한 것이 비단 수능 성적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예산안에 적절히 개입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미시경제학을 공부할 때는 모든 개인의 효용이 최적화되고 모든 기업의 이윤이 극대화되고, 모든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일반균형’이라는 개념에 매료되었다. 두 사람의 물물교환에서 적어도 한 명의 효용은 증가하고 어느 누구의 효용도 감소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파레토 효율’의 개념을 담은 에지워스 상자를 머리에 담고, 입에 달고 살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제학 이론에 대한 나의 믿음은 깨지기 시작했다. 1학년 때, 원론 수업에서는 시장에 불균형이 생겨도 균형이 자동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의문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2학년 때, 교수는 질문을 던졌다. “임금이 떨어지면 노동 공급을 줄일까요, 늘릴까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주 당연하게도, ‘늘린다.’ 답은 정반대로 ‘줄인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상품의 가치가 오르면 공급을 늘리고,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면 공급을 줄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노동이라는 상품의 가치이므로, 임금이 떨어지면 노동 공급을 줄인다는 것이 미시경제학의 대답이었다. 거기에는 노동을 공급하는 개인이 양(+)의 불로소득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있었다. 생활비, 빚과 고정 지출을 간신히 메우느라 ‘꺾기’ 앞에 다른 직장을 구하고, 임금이 떨어지면 일을 늘리는 현실의 노동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3학년 때, 노동경제학 수업에서 교수는 교재의 노동조합 파트를 아무렇지 않게 건너뛰었다. 


4학년 때, 계약 및 조직이론 수업에서 나는 시민단체의 농성과 투쟁을 수업을 통해 배운 대로 게임이론으로 분석했지만, 그 깔끔한 결과물을 어디에 써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름답게 맞물리는 공리들이 남긴 건 현실에 대한 외면이거나, 현실에 대한 과도한 추상화였다. 나는 현실을 보고 싶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자기조정 시장, 혹은 완전한 자유방임에 대한 경제학의 ‘이상’이 어떻게 사회 혹은 사회적 관계들을 파괴해 나갔는지 풍성한 사건들과 제도적 변화들을 통해 논증하고, 수학적 경제학 이론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사회 현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회, 정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자기 조정되는 시장을 통해 굴러가는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분명히 지칭하는 폴라니의 주장은 사회민주주의 사례들만 이야기해도 ‘이상을 추구하지 말고 현실을 보라’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현실’에, 그것에 대한 모든 대안을 ‘이상’에 대응시키며 단숨에 기각하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경제학은 물물교환-화폐-신용이라는 단선적 모형을 상정하고, 무인도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의 물물교환을 통해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설명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현실의 사례들을 설명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설명의 근거로는 언제나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고안된) ‘마을 A’나 (자신들에게 필요한 만큼 차용한) 미적분학의 공리를 동원한다. 현실을 통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무관하게 전제한 공리들로 현실을 설명하려 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경제학이 픽션이라고 일갈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그레이버, 2021). 


문제는 경제에서 경제학이 탄생했다기보다 경제학이 현실 경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MacKenzie, Muniesa, & Siu, 2007). 경제학은 시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기보다, 특정한 형태의 시장과 국가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폴라니가 이 거대한 책 전체에 걸쳐 밝혀내고 있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 통해 만들고자 한 시장으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가 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오히려 모든 사회에 존재해 온 것은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 도덕적 관계로서의 공산주의다(그레이버, 2021). 


그 과정에서 폴라니는 ‘사회’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폴라니가 국가와 시장 사이의 관계, 자유시장이 파괴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 그리고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 체제를 지닌 사람들로부터 발견해내는 것을 통해 유추하건대, 그가 발견해내고자 하는 ‘사회’는 합의된 적절한 규제를 통해 다수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집합체이며,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유대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마르셀 모스가 특정 사회의 친족 제도와 도덕관념, 종교 등의 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로서의 경제적 행위, 경제적 관계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계속해서 개인, 집단들 사이를 연결하여 구성해내고 있는 사회적 연대와 같은 것이다(모스, 2002). 


경제가 사회에 묻어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실상 경제가 총체적 사회적 사실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폴라니가 취하고자 하는 것 또한 경제에 대한 총체론적 접근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상품 허구’는 바로 이 사실을 부정하는 시장의 현 상태를 비판하는 개념일 테다). 이때 ‘잔존(survival)’ 개념을 ‘여전히 남은 과거의 것’이기보다 ‘현재에 특정한 목적에 복무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폴라니는 과거에 벌어진 일들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더 주목하는 듯하다(폴라니, 2009: 473). 과거의 사회를 도덕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것으로 단순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고, 그것이 곧 가능성이나 희망이나 대안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다만 인간과 자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 폴라니의 모습에 가까운 것 같다. 


<거대한 전환>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경제학이 그토록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물질적 배치나 기술적 변화에 대해서는 깊이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의 전체적인 서술은 경제학 혹은 자기조정 시장의 유토피아가 사회를 파괴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거기에 개입하는 법과 제도, 국가와 자본의 역동을 풍성한 사례를 들며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경제학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픽션이지만 시장을 매개로 세계를 장악하고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다소 부족하게 느껴진다. 특정한 경제학적 지식들이 시장을 만들어낼 때 거기에는 그 당시 개발된 도량형이나 회계·경영·계산·통계 도구 혹은 기술이 깊숙이 개입한다. 이러한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요소들을 통해서만 경제학은 구체적인 시장의 형태로 관철될 수 있으며, 시장을 만들고 국가에 개입하고 사람들의 삶에 침투할 수 있다. 


폴라니의 설명이 주로 법, 제도, 학문적 지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가 다루는 주제의 규모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으나, 그 과정에서 경제학(적 지식)은 마치 문화가 특별히 방해받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다른 지역과 사람들에게 전파된다는 문화전파론과 같이 저절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파’는 수없이 많은 기술적 대상들과 사람들 사이의 번역이라는 물질적 과정에 의해 간신히 가능해진다. 그 구체적인 실행들과 그것에 결부된 기술적 대상들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경제학(적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절대화되어 버린다. 그것에 개입하고 그것을 바꾸어내고 싶다면,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실행되는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확산 모형이 아닌, 번역 모형을 통해 폴라니의 저작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라투르, 2016). 


나는 요즘도 폴 새뮤얼슨이 만들어낸 미분가능한 아름다운 세상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경제학의 아름다운 이상이 무엇을 파괴해 왔는지, 그 이상을 지탱하는 공리들이 무엇을 정당화해왔는지. 필요한 것은 몇 페이지로 요약될 수 있는 간결한 공리들에서 연역되는 픽션이 아니라, “지저분한 현실”(잉골드, 2020: 13)에 얽힌 인간과 기술적 대상들과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탐구하는 불순한 지식,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 빚을 주고받으며 질척이는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나가는 실천일 테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가능한 많은 대안적 상상”으로서의 픽션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은 알 수 없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성향을 인간의 바탕으로 여기고 문명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이기 때문이다(그레이버, 2009: 491; 그레이버, 2021: 147).



■ 참고문헌

그레이버, 데이비드. (2009)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서정은 옮김, 그린비

그레이버, 데이비드. (2021)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라투르, 브뤼노. (2016) 젊은 과학의 전선, 황희숙 옮김, 아카넷

모스, 마르셀. (2002) 증여론, 이상률 옮김, 한길사

잉골드, 팀. (2020)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 김지윤 옮김, 프롬북스

폴라니, 칼. (2009) 거대한 전환, 홍기빈 옮김, 도서출판 길

MacKenzie, D., Muniesa, F., & Siu, L. (Eds.). (2007). Do Economists Make Markets?: On the Performativity of Econom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2307/j.ctv10vm2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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