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형과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많이 존경하는 친척 형이 크론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덕질을 하다가 만난 형이라 사적인 이야기를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는 서로의 질병과 고통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크론병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 자신의 친척 형을 떠올리며 눈물을 닦던 그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먹고 있는 다양한 약들의 부작용 때문에 크론병인데도 오히려 살이 붙어 있는 나와 달리, 그의 친척 형은 '해골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가 '크론병'을 이해하고자 할 때 떠올리게 되는 건 단지 건강 중심 사회의 담론이기보다, 가까이서 마주한 아픈 몸의 실재인 것이다.
나는 그 친척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연민했다. 아직 전 세계적으로 크론병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기에 병을 진단받아서 제대로 처치도 못 받은, 그래서 지금까지 비쩍 마른 환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를 연민했다.
그를 연민하는 건 괜찮은 일일까? 그에 대한 나의 연민은 어떤 의미였을까? 관해기인 환우로서의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질병을 마주하면 으레 보이게 되는 건강 중심 사회에서의 동정심이었을까? 너무나도 건강하고 운동도 잘했지만 순식간에 '추락'한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이었을까?
큰 교통사고로 인해 온몸에 철심이 박혀 있다고 말하는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왼쪽 얼굴과 재건된 오른쪽 얼굴의 미세한 차이를 감각하는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항상 통증을 달고 살아서 자기도 잠을 제대로 자는 날이 별로 없다는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어떤 생각을 해야 했을까? 이 고민들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질병에 대한 나의 고민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당위들에 갇혀 버린 것일까? 고이는 눈물을 참은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팠고 빠르게 나아진 나는,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건강 중심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어 생산해낼 수 있는 나는, 평상시에 질병을 별로 인지하지 못하다가 때로 쏟아지는 피에 질병을 상기당하는 나는, 타인의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질병을 이러저러하게 대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타인의 질병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주 일상적인 울컥함과 망설임들 앞에서 나는 질병을 대하는 일에 대한 정답 같은 건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질병에 대해, 고통에 대해 쉽게 얘기한 날들이 있었다. 고작 '질병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라는 일상적인 질문 앞에서 나는 또 수많은 물음표를 마주한다. 그것들을 쉽게 마침표로 바꾸진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