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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Mar 06. 2020

역병이라는 스펙터클

코로나19 안에서 어떤 현실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

먼저 읽으면 좋은 글

- 바이러스는 어떻게 질병이 되는가


    코로나19 사태에서 바이러스가 질병으로 변하는 과정보다 중국인, 신천지 등에 유독 집중포화가 쏟아진 것은 역병이 하나의 스펙터클로 활용되는 상황 때문이다. 사실 역병은 언제나 훌륭한 스펙터클이었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선영과 위근우는  라디오에서 재난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의 무의식을 이야기했다. 재난 영화 중 점점 좀비 영화가 늘어나고, <부산행>(2016)처럼 시장에서 성과도 크게 거두는 이유는 ‘감염’에 대한 공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과연 충분할까?


    ‘역병 정국’을 맞아 감염병의 창궐과 사회 혼란을 소재로 한 영화 <감기>(2013)와 <컨테이전>(2011)은 소위 ‘차트 역주행’을 시작했다. 감염병이 퍼진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이유인데, 그렇다면 이는 일종의 ‘성지 순례’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이 황당하다. 성지 순례라니, 사람들은 정말 이 상황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고, 개학·개강 등도 미뤄지면서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넷플릭스의 사용자가 증가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감염병 관련 콘텐츠 열풍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한에서 폐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2019년 12월 31일 즈음부터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넷플릭스가 <판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을 2020년 1월 22일에 공개한 것은 놀라울 만큼 시의적절했다. 왓챠플레이는 영화 <컨테이전>으로 과학자들과 함께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여 올렸다.


    이뿐 아니다. 영화를 방영하는 채널들에서는 <감기>와 <컨테이전>의 편성을 빠르게 늘렸으며, ‘스크린’이라는 채널에서는 시청자들의 요청이 쏟아져서 <컨테이전>을 편성했다고 SNS에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만이 아니다. 가짜뉴스 생산을 넘어서 질병관리본부에 장난 전화를 걸거나 확진자 추격전 등을 꾸며낸 유튜버들까지 발생하자 국내 유명 유튜버들이 소속된 한국MCN협회에서 자정 결의를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공포, 사회 혼란을 해결하기보다 그것에 편승하려는 이들이 생겼는데, 편승하는 방법의 핵심은 이미지의 활용이었다. 현장에서 분투하는 의료인들의 모습,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을 그리는 영화, 사람들의 공포를 그대로 반영하는 영상들. 이 이미지 중 어디에도 질병은 없다. 의료인들은 바이러스를 막거나 제거하는 영웅이었고, 극한 상황에서 감염은 곧 사망이었으며, 확진자를 쫓고 방역하는 모습은 바이러스의 차단과 사람에 대한 불신을 반영했다.


    바이러스에만 집중하는 스펙터클은 확진자 동선 공개와 조롱•비난을 넘어 ‘확진자’라는 단어를 활용하여 집에만 있느라 살이 ‘확 찐 자’라고 말하는 유머로도 이어졌다. 123만 명이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쏘아 올린 사이비와의 전쟁도 황당하고 압도적인 스펙터클이었으며,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을 소재로 만들어진 포르노까지 등장했다. 영화이론가 기 드보르(2014)는 스펙터클을 “이미지들의 총체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매개로 형성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고 정의했다. 즉, 앞서 언급한 이미지들만이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싹 튼 불신과 공포, 혐오까지도 스펙터클에 포함된다. 스펙터클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구조의 문제를 외면하게 한다. 공포-불안-혐오라는 관계 안의 스펙터클은 바이러스-차단-추적이라는 스펙터클과 맞물리고, 이는 모두 역병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스펙터클에 포섭된다.


    그런데 모든 재난이나 참사가 이런 방식의 스펙터클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영화를 방영하는 채널들에서 재난 영화 편성이 모두 취소되었다. 사람들은 왜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 사망을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세월호 참사에서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죽었고, 코로나19 사태에서는 기저질환이 있는 이들을 포함하여, 요양원의 노인들과 시설의 장애인들이 죽고 있다. 둘 다 사람이 죽었지만,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애도에서 그치지 않고 진상 규명으로 나아가려 했고, 요즘의 콘텐츠들은 공포와 불안만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위험을 유머로 소비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죽은 이들을 진정 생각하고, 애도한다면, 이런 상황을 불러온 세상을 바꿔서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하는 집요한 의지가 역병이라는 스펙터클의 마력보다 강해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the event)’은 기존의 질서를 찢고 나온 진실(truth)을 보여주는 것이며, 오직 역사적 상황들의 구조만이 사건을 가능하게 한다. 즉, 사건은 필연적이고, 사건 이후에는 길고 느린 보충의 과정, 즉 해석과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는 명백한 '사건'이었고,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난 요양원의 노인들과 시설  장애인들의 집단감염  사망도 '사건'이다. 글의 앞뒤에 첨부한 링크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죽인 것은 단지 바이러스가 아니다. 이 사회의 역사와 구조가 그들을 죽이고 있다. 


    나는 정돈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의, 어떤 죽음을 진지하게 여기는가? 우리는 어떤 죽음에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노인, 환자, 장애인을 고려하고 있는가?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여기는 대상을 스펙터클로 소비할 수 있는가? 역병이라는 스펙터클은 어떤 이들의 삶과 죽음을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권력의 소산이 아닌가? 우리가 스펙터클에 현혹되어 놓쳐 버린 세상의 이면은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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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기 드보르 (2014)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역, 울력: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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