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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5. 2019

죽음을 달라

[장애/질환/통증/몸] 죽음에 접근할 권리는 누가 독점하는가?

난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해


   휠체어를 사용하는 친구가 나에게 한 이야기다. 창문도 너무 높고, 목을 매려고 해도 어렵고, 한강 다리에서도 뛰어내리기에는 울타리가 너무 높다고, 그래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게르니카 문집에 기고된 글 중에 처음에 ‘마포대교배프추진위원회’라는 닉네임으로 들어온 글이 있었는데, 이 닉네임이 시사하는 바도 이러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신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중단시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에 삶을 끝내는 권리를 포함해서, 비장애인들과 똑같은 권리와 선택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 B.C. Coalition of People with Disabilities, "Submission to the Senate Special Committee on Euthanasia and Assisted Suicide", 1995, p. 2., 수전 웬델,『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강진영ㆍ김은정ㆍ황지성, 그린비, 2013, 295쪽에서 재인용.


   우연히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올해까지 나는 매년 거르지 않고 적어도 한 번은 장례식장에 가고 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친구의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갔을 때 문득 느낀 것은, 장례식장이 전혀 배리어프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장례식과 식사가 진행되는 방 앞에까지는 갈 수 있지만, 거기에서는 우선 신발을 벗고 턱을 올라가서 매끈한 바닥을 지나 영정 앞으로 간 후―절을 하거나 꽃을 두거나 향을 피우거나 기도를 하는 등의―장례식 절차를 ‘밟고’ 유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밥을 먹는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 밥을 먹는 공간에는 아주 낮은 밥상들이 있고, 완전히 좌식이다. 몸을 기댈 곳은 벽면 빼고는 없다.

   이 사회에서 지체장애인은 맘대로 죽지도 못하고, 죽은 이와 인사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모두가 그렇듯이 장애인에게도 망자를 배웅할 권리가 있다. 모두가 그렇듯이 장애인에게도 자신이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할 권리가 있다.* 애도와 자살조차 독점되는 사회에서 지체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는 영정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도 있고, 장례식 문화에서는 육개장과 편육이 기본이고 채식 선택지는 없는 밥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권장된다. 여기서 만성질환자와 청각장애인은 배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사회에서 유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면 그 장례식은 얼마나 황당한 모습이겠는가?

   이런 사회에서 장애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름이 붙여지기도 전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죽는다. 2014년 송국현 씨는 3급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지원받지 못하고, 집에서 화재가 나서 사망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해석될 수도 있다니. 이 말이 이 맥락으로 들어오면 장군의 용맹함은 사라지고 사회의 잔인한 무지만 남는다. 이러한 무지에 파묻혀 있으면 장애인식개선 연극에서조차 죽음이 마치 장애로부터의 해방인 것처럼 그려지기 마련이다. 휠체어를 타던 사람이 갑자기 두 다리로 걸으면서 천국으로 나아가는 장면은 이 사회에서 천국조차 배리어프리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장애는 속박이고 죽음은 그로부터의 해방인가? 그 해방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성취되었나?

   장애인에게도 죽음에 접근할 권리, 죽음접근권이 있다. 나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장애인에게도 죽음접근권이 있다. 죽음을 달라. 죽음과 인사하게 해 달라, 죽음과 만나게 해 달라. 죽음접근권을 보장하라. 접근성은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죽음의 문제다. 죽음을 달라, 죽음을 달라!

* 알베르 까뮈, 『시지프의 신화』, 이가림, 문예출판사, 1990, 12p,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치 멜로 드라마에 있어서처럼,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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