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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5. 2019

부마자, 장애인, 질환자, 그리고 무당

[장애/질환/통증/몸] Escaping the Curative

 OCN 드라마 <프리스트>의 11화에서는 이해민 성직자가 매우 명시적으로 “부마는 질병과 같다”고 언급했는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드라마는 분명 부마를 치료되어야 하는 질병으로 다룬다. 앞에서도 구마와 양의학이 협력을 했으나, 13화에서는 아예 구마 장소에서 성직자들에 둘러싸여 외과 수술을 집도하고 그 직후 구마를 시도하는 장면까지 등장했다. 이는 ‘메디컬 엑소시즘’이라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마자가 남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 구마 집단이 반드시 부마자를 붙잡아 구마가 완료될 때까지는 구마 이외에 다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부마자를 밀어넣는다. 즉, 부마자는 Alison Kafer가 <Feminist, Queer, Crip>에서 제안하는 ‘치료만의 시간Curative time’에 포섭된다. (그리고 이는 검은 핏줄과 ‘악마의 목소리’, 변한 눈동자를 통해 직관적으로 정당화된다.) 이는 진료 시간이나 치료를 하는 시간과는 구분되는데, 질환자나 장애인에게는 오직 치료/재활만을 요구하며 그것이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질환자와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시킴으로써 그들을 고립시키기에 이른다. 치료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는 않으나, 치료만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건 생명이라기보다는 삶이고 생애니까.


부마자의 재현은 여러 면에서 장애/인과 유사하다. 기본적으로는 부마자가 일시적으로 악마에게 조종당한다는 면에서 정신장애 중 ‘해리성 정체감장애’와 유사하고, 걷는 모습이 자주 절뚝거리는 식으로 묘사되고 몸이 ‘뒤틀린’ 형태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뇌병변/지체장애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구마 의식 중에 나타나는 증상은 간질장애인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들과 상당 부분 오버랩된다. 나는 이전에 “The Origin : History of PSYCHIATRY & ARTBRUT”이라는 전시회에 다녀와서 후기를 남겼는데, 아래는 그 중 일부다.


간질 환자의 모습을 찍은 영상과 간질 증상을 묘사한 그림은 우리가 공포영화에서 흔히 보는 귀신, 혹은 귀신에 빙의한 모습과 거의 일치했다. 어쩌면 공포영화들은 귀신의 묘사를 통해 간질 환자들에 대한 편견 혹은 낙인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 편견 때문에 간질 환자들이 '사람'이 아닌 '귀신'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무엇에 공포를 느끼고, 누구를 인간 범주에서 추방하는가? '퇴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에서 읽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우선 푸난바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1장에서는 인간이 아닌 ‘혼령otu’으로 취급되는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는 푸난바족에서 유일하게 고유한 이름이 없었으며, 그의 기형인 팔다리를 암시하는 말로 대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푸난바족에서는 장애나 손상을 출산 전후에 일어난 금기 준수 의무의 방기로 인한 결과로 생각한다. 이는 “불길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간질을 포함하는 정신적 장애의 경우에도 그것이 비인간의 혼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여기서 장애나 손상은 분명 어떤 책임이나 불행에 의한 것으로 그려짐에도, 이것이 해당 개인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들 중 어떤 것도 그러한 손상을 지닌 사람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만들지 않는다(89)”. 비록 ‘마녀’와 같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2장은 마사이족의 사례를 다룬다. 마사이족은 “어떠한 신체적 손상은 불운하거나 ‘나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바란 바가 아니었으므로 이로 인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112~114). 기형아의 출산 혹은 유산, 불임, 자연재해 등은 불운(엔토로니entorroni, 즉 ‘나쁜 것’, ‘죄’)으로 범주화되며, 이는 근본적으로 ‘자연’ 또는 엔카이Enkai(신)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 간주된다. 때로는 기형아가 엥고키engoki(죄악)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물려받은 죄과 혹은 신력에 의해 부과된 저주에 의한 징벌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그것 때문에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119)”. 이처럼 손상이나 장애가 가족이나 신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고, 아이의 나쁜 건강 상태가 어머니의 도덕적 책임으로 설명되기도 하는 등 손상, 장애, 건강은 항상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마사이족은 엔카이에 의해 야기된 질병이 실제적 치료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지고, 기형아들은 대체로 비장애아동들과 동일하게 대우된다. 그러나 지적장애 아동은 “짐승 같은 생명체(괴물), 즉 인간계의 경계를 벗어난 존재”인 엥구구우enguguu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장애’인은 숨겨지지도 않으며, 불결하거나 오염된 것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134)”.


소말리아 남부의 휴비어족/소말리족에서도 마사이족의 경우와 유사하게 대부분의 경우 ‘장애인’이라는 포괄적 범주는 사용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신체적 손상은 ‘개성’으로 취급됨에도, 청각장애나 시각장애의 경우 그보다는 낮은 대우를 받고, 정신적 장애인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 4장의 송게족의 경우도 마사이족과 유사하다. 여기서는 손상이나 장애가 마법에 의해 발생하며, “마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허약한 도덕적 상태에 대한 하나의 징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의 네 경우는 장애/인이 불행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장애/인이 곧 불행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한국과는 다르다. 나는 이것이 경제 구조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데, 1장의 말미에서는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기존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내던 장애인들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배제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기존에는 위의 사례들에서처럼 개별적으로 지칭되던 손상들이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장애’로 묶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근대 사회에 들어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구분은 임노동 관계로의 포섭 가능 여부에 따라, ‘불인정 노동’ 계층이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72).”


실제로 미국에서 장애가 곧 오염이나 불행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위의 네 부족과 달리 신이나 마법을 원인으로 추정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불행이며 죄로 인한 징벌이고, 오염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정신장애에 대해서 그것이 저주나 귀신에 의해 발생했다는 인식이 꽤나 최근까지도 있었고, 무당이 신내림을 받기 전의 상태를 무병(巫病, Schamanen-krankheit) 혹은 신병(神病)이라고 부르는 등 이것이 질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카톨릭의 경우에는 부마가 이처럼 여겨진다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의 차이는 신병의 경우 ‘신내림’이나 ‘말문 열림’ 혹은 ‘내림굿’을 통해 신병이 ‘치료’되면 그 이후에는 신과 교류할 수 있는 자가 되는 반면에, 카톨릭의 경우에는 구마 의식으로 ‘치료’되면 악마는 부마자의 몸에서 빠져나와 사라지거나 봉인된다는 점이다.)


정신장애의 경우 다양한 문화권에서 귀/신, 조상, 마법, 죄에 의한 것으로 그려지고, 귀/신이나 악마가 인간과 관련되는 현상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정신질환으로 인식된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매체에서 재현되는 방식도 유사하다. 부마자나 무당은 사람도 귀신도 아닌 경계적 존재이며, 잘못하면 악마나 귀신이 옮겨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오염/감염의 위험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동시에 감염의 위험을 지닌 좀비와도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좀비도 많은 경우 그 걸음걸이나 몸의 움직임이 지체장애인과 유사하게 묘사된다. 앞서 열거한 수많은 유사성들로 인해 사람들은, 좀비나 부마자를 보고 장애인을 떠올리지는 않을지 몰라도, 장애인을 볼 때에 좀비나 부마자의 이미지가 떠오를지 모른다.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시선에 자연스럽게 ‘징벌’이나 ‘저주’, ‘오염’에 대한 생각들이 녹아들어 있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대중문화 속에서 퇴치하고 퇴마해 온 건, 어쩌면 귀신이나 악마가 아니라 사람 아니었을까?)


무병이 있는 경우에는 거의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내림굿을 받아야 하고, 좀비의 경우에는 죽이거나 치료제를 만들거나 해야 한다. 그러니 좀비는 그야말로 완전히 치료만의 시간에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부마자는 좀비와 보다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 부마자와 좀비는 장애인이나 질환자처럼, 오염에 대한 공포의 대상이 되고, 특히 정신질환자처럼 ‘치료만의 시공간(Curative Chronotope)’ 속에 ‘수용’된다. 반면 무당은 접신을 위한 시공간에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수동적인 고립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오히려 나는 무당의 이야기에서 수전 웬델이 말하는 “몸의 초월”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무당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신의 퀴즈: 리부트>를 보면서도, 과연 치료만의 시간이 강요되지 않았다면 저런 죽음들이, 희생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미디어에서 나는 끊임없이 죽는, 죽어가는, 갇혀 있는, 치료되는 이들만을 마주한다. 아픈 채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왜 없는 걸까? 우리에게는 좀 더 많은, 적극적인 아픔의 재현이 필요하지 않을까? 병원 밖의, 아픈 내 이웃, 친구의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두 장애인 표식을 떠올린다. ‘아픈 사람’은 여태 너무나 왼쪽의 분위기로만 묘사된 것이 아닐까? 진취적으로 자신의 고통과 싸워나가는 투사로서의 ‘아픈 사람’ 서사가 더 많이 써지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마치 대단히 건강하지도 않고, 아주 아프지도 않은 중간자의 위치에 있는 애매한 ‘아픈 사람’이 마치 무당처럼, 그 위치에서 양쪽을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낙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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