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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룩 Jul 05. 2019

통증 속에서 모험할 권리

[장애/질환/통증/몸] Escaping the Curative

<신의 퀴즈: 리부트> 5, 6화에는 뇌 실험을 통해 영적 체험을 하려는 의사가 나온다. 이 의사는 요양병원의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희귀, 불치병 환자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을 그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뇌 실험을 진행한다. 그리고 이 시도는 드라마 안에서 매우 비극적이고 비이성적으로 그려진다. 의사는 수많은 무연고자들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드라마는 몇 대사를 통해 이를 장애학의 관점으로 해석할 지점을 남겨 둔다.

“세상이 뭔데 내가 나한테 평화를 줄 자유까지 박탈하는 거예요? 치료하지 못하면 그 자유라도 줘야 하잖아요. (...) 난 또, 오늘부터, 또 다른 지옥을 사는 거예요.”

실험 대상이었던 사람이 실험 후 살해당하다가 구출당한 뒤에 한 말이다. 과연 이는 구출이었을까? Jasbir Puar의 <The Right to Maim>이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병원에 붙잡혀 치료만의 시간(curative time)을 보내는 환자들은 자신의 몸, 자신의 자아에 대한 주권이 있을까? Alison Kafer는 <Feminist, Queer, Crip>에서 ‘cure’와 ‘curative’의 의미를 완전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치료(cure)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치료 이외의 시간을 전혀 상상하지 않는(curative), 치료만의 시간은 환자들의 삶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curative’의 개념은 김은정 교수의 저서 <Curative Violence>로도 이어졌다.) 이는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에서 제기된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당연한 욕망’의 문제를 개념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국가는 주권을 통해 살해할 권리, 상해할 권리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협의로서의 주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장애인들 중에서는 자살을 할 수 없어서 자살 보조를 받고자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 또한 <거부당한 몸>에 소개가 되며, 학술지가 아닌 경우에도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경우에서도 이를 다루고 있다.

질환자와 장애인의 미래가 모두 지옥이기만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증상의 정도에 따라, 질환과 장애의 유형에 따라 경우는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현재의 의학이 치료할 수 없고 완화조차 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질병과 장애에 대해 ‘건강’만을 (이는 또한 누구의 건강인가?)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일상도 일상이다. 그 ‘건강’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강요는 시설 수용(institutionalization)으로 직결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시간과 공간을 철저히 분리한다.

저 대사 다음에는,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이어진다. “아무리 좋은 세상으로 가더라도 두고 온 사람까지 망각할 수는 없어. (...)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거, 그게 이상향이 될 수는 없어.” 그러면서, 나를 위해 함께 아파해 준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아플 때 나에게 필요한 건 나를 위해 함께 아파해 주는 사람들일까, 진통제일까? 그 사람들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리적 안정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함께 아파해 주길 원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 떠들고 나와 함께 놀기를 원한다. 물론 가능할 때에 말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얼른 나으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아프지 말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러나 나와 다른 만성질환자들은 서로에게 얘기한다. 덜 아프라고. 안 아플 방법도, 치료할 방법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나를 위로해 주려는 시도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들에게 고맙다.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아프지 않은 미래만을 상상할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나에게는 아프고 피곤하며 즐거운 일상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지막에 드라마에서는 ‘죽음 체험’을 한다. 생명, 삶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드라마의 작가는 결론을 정해 뒀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의 의지’로 견뎌야 한다고.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아니. 그 둘 사이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다. 여기서의 ‘사람’에 그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결국 이 드라마의 작가는 ‘희대의 천재 의사’ 한진우 박사의 입을 통해 ‘치료를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의지의 환자’를 이상향으로 설정한다.

‘아픈’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함께 살고 있다. 불구의 시간(crip time), 불구의 미래(crip future)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차피 아픈 사람이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드라마의 분위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뇌 실험을 그저 광기와 비이성의 산물로만 보는 그 시각 말이다. (여기서 광기와 비이성이 격하의 도구로 사용되는 현상과 과학만능주의 또한 문제시해야 할 것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도 나오듯이, 오줌이 마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닌 화장실이다. 마찬가지다. 실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희망이 아니라 진통제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건 이상향이다. 뇌 실험을 통해 ‘다른 세상’,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면, 피험자의 동의가 있다면, 피험자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를 무엇을 근거로 막을 수 있는가? 그의 몸에 대한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육체의 고통을 의지로 견딜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온전히 육체의 감각으로 환원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을 때에는 정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이때에 나는 천국으로 가는 위험한 가시밭길에 도전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를 잠식하는 통증 속에서 천국을 향해 모험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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