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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청환 Dec 28.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 박청환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 (p47)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 책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상’ 말고 ‘사람’.

  대한민국에서 빨갱이 혹은 빨치산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본인이나 그 가족, 친인척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마저 피해가 갈까 염려하여 알아서 그들과 친밀함의 거리를 조절하며 살아야 했던 존재였다. 그러한 굴레 속에서 평생을 살아 낸 한 사람이 있고, 그의 장례가 치러지는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딸의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빨갱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적 굴레를 쓰고도 평생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 모두와 어울려 살았던 사람, 매일 투닥이며 함께 노는 친구가 평생 조선일보를 애독하고 교련 선생을 하던 이였으며, 친구이기도 했던 아내의 죽은 전남편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 없이 아내와 만담 나누듯 하는 사람, 자신의 장례식에 나타나 ‘잘 뒈졌다’고 침을 뱉는 이와 생전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 방황하는 고등학생 혹은 자신의 딸과 담배 친구가 되기도 하는 ‘독특한’, ‘사람’의 이야기다. 반면 남자이고 친구이면서, 남편이고 아버지일 뿐인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서로 다른 사상 혹은 이념을 나눠 가진 사람들, 망자 외의 어떠한 접점도 없는 이들이 한 공간에 평화롭게 앉아 있다. 언성을 높여 서로를 성토하는 대한민국의 여느 보수 진보와는 달리 서로에게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망자를 추도하는 중이다.  사람 속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선명하게 그어졌던 이념의 경계가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진즉에 깨우치고 받아들인 이의 장례식이기에 가능한 풍경 아닐까.

  “또 올라네.” (p197)
  한 번만 와도 되는 장례식장에 자꾸만 또 온다는 아버지의 지인들을 보며 한 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미움과 우정과 은혜와 사랑이 얽히고설킨, 그 질기고 질긴 마음들을 바라보는 딸은 비로소 아버지를, 사람을,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일원이었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자 연인이었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친구이고 이웃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평생 알아 온 아버지의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며 사람의 삶이란 천 개의 얼굴로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그가 빨치산이었던 시간은 고작 사 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딸은 빨치산 시절 아버지의 주 활동 무대였던 백운산에 모시려던 생각을 접고 유골함을 안은 채 발길을 돌린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삶이 녹아 있는 고향 구석구석에 유골을 뿌린다.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이웃으로 살았고, 친인척과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있는 그곳이 아버지의 뿌리임을 깨달았으므로. 신념이란 단지 뿌리에서 뻗어 나간 한 기둥에 불과한 거니까. 가지가 잘리고 꺾이면 언제든 새순을 밀어 올릴 수 있는 뿌리가 진짜배기니까.

  삶이 어찌 직선이겠는가. 삶의 매 순간들이 항상 인과의 궤적을 그리는 것도 아닐진대. 순간은 순간일 뿐. 어느 한순간에 사람을 가둬 놓고 규정짓고 옭아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순간이 점이 되고 점이 선이 되고 선이 길이 되어 한 사람의 인생이 되는 것이다. 삐뚤빼뚤하고 때로 여러 갈래이기도 한 길. 그 길이 때때로 향기롭고 아름다우면 되는 거다. 바람에 이리로도 저리로도 날아가는 아버지의 유골은 울퉁불퉁 굽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때로 그런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람이고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세상은 그를 이념의 굴레에 가뒀지만, 그는 결코 갇히지 않았다. 세상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평생 사람을 끌어안고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온 그는 함부로 씌어진 굴레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해방시킨 채 살았다. 백운산에 묻힐 뻔한 유골이 그의 온 생애가 서려 있는 고향 마을 곳곳에 뿌려지는 장면은 그의 해방이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음을, 아니 그는 한 번도 그 굴레에 갇힌 적이 없음을 공식화하는 장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특별히 꼭 읽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픈 우리 현대사의 비극에 기대어 툭하면 이념 논쟁을 끌어내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모종의 정치적 이익을 획책하는 사람들 말이다. 온 국민의 가슴에 엄숙한 자부심으로 펄럭이는 독립 영웅의 동상을 철거하니 마니 안 그래도 속상하고 시끄러운 요즘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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