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몸의 기후학-비와 당신의 이야기

1장 비의 첫 장면 - 기억을 여는 소리

by 유혜성

1장 비의 첫 장면 - 기억을 여는 소리


비가 오면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그걸 쓰다 보니
사람을 이해하는 책이 되었고
결국 나를 이해하는 책이 되더라고요._By유혜성


1. 소리의 문


비는 우리의 시야에 닿기 전에

먼저 소리로 다가온다.


눈으로 보기 전,

피부로 느끼기 전,

비는 가장 먼저

마음의 문을 살짝 두드린다.


창밖 어딘가를 미끄러지듯 스치는 가느다란 또르르,

차 지붕 위에 톡톡 튀어 오르는 작은 두드림,

카페 유리창을 타고 내려오다

서걱서걱, 속삭이듯 남기는 여운.


모양도 높이도 다른 그 소리들이

결국 도착하는 곳은 한 군데다.

바로, 마음의 문.


비가 시작되는 순간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하늘도, 땅도 아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다.


비의 첫소리는

마음을 여는 가장 오래된 신호처럼 작동한다.


이유를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볍게 떨리던 감정이 다시 살아나고,

한 번 접어 넣어둔 기억들이

물이 스며오르듯, 아주 느린 결로

제 모습을 다시 올려 보인다.


비는 날씨이기 전에

기억의 첫 장면이다.


비가 내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어떤 방의 공기, 어떤 계단,

어떤 눈빛을 다시 불러온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의 잔향을 더듬으며

갖고 있던 마음의 문장을

속으로 다시 읽어본다.


그러니까 비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먼저 열어젖히는

조용한 첫 문장 같은 것이다.


비의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 오래된 결도

조금씩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2. 마음을 여는 가장 오래된 감각, 소리


소리는 인간에게 가장 먼저 도착하는 감각이다 ¹.

빛보다 늦게 움직이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더 빨리 닿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언어보다 먼저,

표정보다 먼저,

손끝의 온기보다 먼저

‘소리의 기척’을 감지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누군가를 떠올려본 적 있는가?


복도 끝에서 들린 발걸음 하나에

오래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뒷모습이

순간적으로 겹쳐져 본 적은?


그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순한 감정의 반응이 아니다.

소리가 기억과 감정을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선을 당기는 것이다.


비의 첫소리는

그 연결선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섬세하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음이 아니라,

감정이 숨겨둔 공간을

살며시 열어젖히는 오래된 암호에 가깝다.


그래서 비가 창을 두드릴 때,

우리 마음속에서는

아주 작은 떨림이 일어나고,

그 떨림이 오래된 기억의 문장을

다시 한번 불러낸다.


기억은 소리에 약하다.

특히 비의 리듬은

감정이 저장된 자리까지 닿는

묘하게 정확한 패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빗소리만 들려도

떠나보낸 이름,

미처 건네지 못한 말,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까지

다시 불러오게 된다.


비는 눈에 보이기 전에

먼저 마음에 내린다.

3. 비는 왜 추억을 데려오는가 - 기억의 메커니즘


비가 내릴 때 떠오르는 감정의 대부분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에피소드 기억’에 해당한다. ²


에피소드 기억은

소리, 냄새, 장면, 감정이

하나의 순간처럼 엮여 저장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비가 오면 첫사랑의 교복 냄새를 떠올리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던 날 코끝을 스치던 공기의 온도를 기억하며,

또 어떤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던 뒷모습을 떠올린다.


비는 그 기억 묶음을

억지로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다만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비의 리듬 속에는

사람을 안정시키는 패턴으로 알려진

‘1/f 노이즈(자연의 흔들림이 따르는 통계적 리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³


너무 규칙적이지도,

너무 불규칙하지도 않은 그 파동이

우리 신경계를 느슨하게 풀어주며

기억이 열릴 작은 틈을 만든다.


그 완만한 흔들림이

마음 내면에 조용한 틈을 남기고,

그 틈을 따라

오래된 기억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오래된 이름 하나가

아련하게 손을 들어 올린다.


“나, 아직 여기 있어.”


비는 그렇게,

한때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시간을

다시 현재의 온도 속으로 데려온다.

4. 비는 왜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 관계의 기척


빗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누구든, 결국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같이 비를 피하던 버스 정류장,

한 개의 우산 아래에서

조금씩 더 가까워지던 어깨의 온기,

창밖으로 흐르던 빗줄기를 바라보며

묵묵히 나란히 앉아 있었던 카페의 공기.


비는 관계의 아카이브(기억 창고)를 불러낸다.


연애, 우정,

혹은 이름 붙이지 못했던 마음까지,

비 아래에 있었던 모든 관계의 장면들이

겹겹이 되살아난다.


비가 오는 날,

관계의 결은 평소보다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조금 더 솔직해지고,

조금 더 빨리 마음의 벽을 내린다.


비의 소리가

우리 마음속 방어막을

잠시 부드럽게 낮추기 때문이다.


비 아래의 사람들은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상처받기 쉬우며,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따뜻하다.


비는 결국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기후다.


비가 온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한번 “너”라는 존재를

호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5. 비의 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이유 - 감정의 리듬


비의 일정한 리듬은

인간이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패턴 가운데 하나다. ³


너무 단조롭지도,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이 리듬은

긴장을 살짝 풀어주면서도

감정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않는다.


그 적당한 울림이

감정의 단단한 껍질을 미세하게 풀어주고,

마음 한가운데에

다시 숨을 들이쉴 작은 틈을 만든다.


그 틈 안에서

그리움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관계는

다른 결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다시 사랑해도 괜찮을까?”하는 마음이

고요한 결을 타고 내 쪽으로 번져온다.


비는 감정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윤곽을 또렷하게 한다.


슬픔이면 슬픔대로,

그리움이면 그리움대로,

기쁨이면 기쁨대로,

감정이 “살아 있는 상태”로

다시 우리 앞에 서게 한다.


그래서 비가 내릴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놀란다.


“아, 이 마음… 아직 남아 있었구나.”


비의 소리는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리듬이다.


6. 비는 마음을 여는 소리다


비는 자연의 사건이기 전에

사람의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드는 감성의 기후다.


비의 첫 장면은

언제나 소리로 시작된다.


그 소리가 닿는 순간,

마음의 문이 아주 살짝 열리고,

묵혀두었던 기억들이 돌아오고,

감정이 움직이고,

어떤 사람의 얼굴이 조용히 떠오른다.


비는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몸의 기후학〉은

바로 그 순간,

몸의 감각과 마음의 움직임이 한 기후처럼 겹쳐지는 찰나를

새로운 언어로 읽어보려는 시도다.


비가 내릴 때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기압이나 풍경이 아니라,

호흡의 깊이, 몸의 미세한 긴장과 이완이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기관이 몸이고,

그 뒤를 따라 흔들리는 결이 마음이다.


비의 첫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몸과 마음의 기후가

아주 미세하게 바뀌어 가는 장면을

함께 목격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는 마음을 여는 소리,

그리고 몸의 기후를 바꾸는 소리다.

결국, 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너의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


각주 및 참고문헌


¹ 조지프 르두, 《감정의 뇌》, 이정호 옮김, 휴먼사이언스, 2002.

² 엔델 툴빙, 《에피소드 기억》, 김나래 옮김, 학지사, 2014.

³ R.F. 바스·J. 클라크, 「음악과 자연에 존재하는 1/f 리듬 연구」(개념 해설 기반).


https://www.instagram.com/comet_you_

https://www.threads.com/@comet_you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