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안 해도 돼"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2022년 콤 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제작된 영화 <말없는 소녀>(2023)를 감상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책에 비해 아쉽다는 평가가 대부분인데 이 영화는 평론가들의 평이 좋은 편이다. 책을 읽고 바로 영화를 이어봐서 그런지 책의 장면이 생생히 기억나고 몰입도 잘 되었다. '그 여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섬세한 사랑'이라는 영화 포스터의 소개말이 눈에 띈다. 이야기의 배경이 여름이라 시기도 적절하다.
부모에게서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소녀 코오트는 엄마의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진다. 형편이 좋지 않은 데다 자녀가 너무 많고 엄마의 뱃속에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속 깊지 않은 부모가 내린 일방적인 결정이다. 다행히 낯선 아주머니는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다. 아저씨는 무뚝뚝하지만 가볍지 않아서 믿음직스럽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나이가 많든 적든,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만나 잠시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세 사람,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코오트의 깊은 외로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오래 묵은 상실감, 아픔을 간직한 그들은 썩 잘 어울린다.
아주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아저씨의 속 깊은 배려 덕분에 코오트는 피부와 옷 빛깔이 달라졌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보다 소녀의 마음에 스며든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는 든든함,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고마움, 처음으로 느껴본 집의 편안함과 따뜻함. 이런 기억은 오래오래 코오트의 마음에 남아서 나중에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 말 안 해도 돼.
언제나 그걸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책에서도 밑줄 그은 문장이다. 말없는 소녀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다. 너무 많은 말로 침묵의 가치를 잊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 전하는 가르침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용한 환경, 말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좋아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 애써 말을 걸거나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맺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와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고난 후 자연스럽게 말이 줄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소설을 읽거나 혼자 영화를 보며 하루를 보낸 날, 나는 외로움보다는 충만함을 느낀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내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는, 그 기분이 좋다.
조용히 혼자 감상하기 좋은 영화
<말없는 소녀>를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