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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재 Aug 25. 2019

첫사랑에게 청첩정을 받았다

늘 어려운 말을 하던 그녀

                                                                                        

첫사랑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결혼하니 축복해달라"는. 


나는 꽃이 피는 걸 보면, 꽃이 지는 순간을 상상한다?


                                                                                                   

이런 비슷한 류의 말을 했을때 너(첫사랑)는 14살이었다. 중학교 1학년, 아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무렵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는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딘가 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말들, 한편으론 별 뜻 없던 말들. 너는 그런 류의 말을 하고 나면 늘 뿌듯한 표정을 짓곤했다. 사춘기의 허세였던거겠지. 뭘 알고 한 말이라기엔 맥락이란 게 없었으니까. 어렸던 나는 차분한 너의 말투 뒤에 가려진 우월감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그땐 그런 게 좋았나보다. 뭔가 있어보이는 말들.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 내가 너를 처음 '좋아하는구나' 알게 된 건, 네가 누군가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엉엉 우는 걸 봤을 때였다. 도대체 누가 너를 찼고 울린건지 화가 났던 것 같다. 14년 인생에 엄마 아빠 말고는 누가 좋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던 나였다. 너는 간접적이나마 '이게 누가 좋다는 감정인거야' 알려준 셈이다.   

                                                                                                     

한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다른 이성친구와 놀고 있는 나를 본 네가"아씨 쟤는 나 좋다해놓고!" 라며 짜증을 냈다는 말을 들었다. 어쨰 내가 좋아한다는 게 티가 났었고 너도 그걸 알고 있었나보지. 그 말을 전해준 친구는 "거 봐, 걔도 너 좋아한다니까?"라는 첨언을 잊지 않았다.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을땐 참 진도 나가지 않던 일이 그 날 이후론 꽤 빨리 진행됐던 거 같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엄마가 안 사줘서) 공원으로 널 불러내 고백했다. 너는 그때도 '인연이란 게 어떻네' 식의 문어체 언어를 동원해서 대답했던거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 뒤로 몇 번 만나서 얘기하고,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고.. 그게 전부다.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알잖냐. 워낙 시간이 흐른 일이다. 우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다시 연락이 닿은 건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거진 10년 만이었나. 내가 싸이월드 대문(?)이라 해야할지 하는 공간에 부대명과 우편번호 등을 써놓은걸 봤던 모양이다. 너는 편지에 이런저런 미사여구와 함께 "어릴적 받은 선물들을 보낸다"고 썼다. 몇 가지 군대용품도 같이 보내왔다.
속으로 '뭐지?' 싶었다. 10년만에 이런 감성적인 행동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 와중에 어릴적을 되짚어보니, 어쩌면 이건 날 위한 게 아니라 너 스스로를 위한 자기위안적 행동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군대 간 첫사랑도 있어' 따위의 감성에서 비롯된. 난 너의 이런 감성이 사춘기적 '어려운 단어'들을 썼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너는 '멋진 말을 쓰는 너'가 좋았고, '군대에 간 첫사랑까지 챙기는 섬세한 너'가 좋았던거지. 그 장단에 맞춰 나까지 우수에 찰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왜 돌려받았는지 몰랐기에, 돌려받은 것들 전부 전역할때 부대에 두고 나왔다.  

                                                                                                            

그리고 얼마 전 넌 내게 다시 연락해왔다, 청첩장과 함께. 이번엔 뭘까. 사람이 급하게 필요했던걸까? 아니면 첫사랑에 대한 어떤 기묘한 영감이라도 다시 떠오른걸까? 
이어진 카톡.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다시는 말 걸일이 없을 것 같아서" 로 시작된 너의 문장은 예상외로 구구절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했다. 어쩌면 더 이상 내게 잘 보이고 싶은 유년의 허세 따위가 없기 때문이리라. 너 자체가 성숙한걸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이게 나았다. 이제는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나나 너나, 이제와서 '첫 사랑'에 의미부여를 하기엔 맥이 좀 빠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의 청첩장은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작별인사로 받아들였다. 

일요일 아침, 창 밖으로 해가 들어온다.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으려' 잠자는 아내 옆에 풀썩, 앉아본다. 햇빛을 받은 침대시트 먼지들이 아내의 숨결을 따라 노선을 달리하며 춤춘다. 괜히 쓰담쓰담 하길몇 번, 이내 아내가 일어난다. "어쭈~"라는 아내. "첫사랑인지 첫방구인지 하는 여자 결혼식이라더니, 안 가고 잘 있네?"라며 엉덩이를 툭툭 친다. 크크크 웃음이 나온다. "그래. 내가 어딜 가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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