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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33] 미션 파서블: 친구 사절단 제주 영접

 친구로 지낸 세월이 인생의 과반수를 넘겨버린, 그야말로 오랜 벗들이 이번 겨울 누추한 나의 제주 집을 찾아주기로 했다. 친구들은 나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사실 내가 있는 제주를 보러 오는 거였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핑계면 어떻고 계기면 어떤가 싶었다. 모쪼록 나의 도민력 게이지를 총동원하여 친구들이 모두 행복할만한 일정을 준비하고 싶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친구 사절단 도착 1일 차, 웰컴 기프트 대령이요

 우선 몇 가지 인테리어 소품으로 작고 귀여운 나의 방을 꾸미기로 했다. 일단 제주 수선화 한 다발을 꽂아두고 친환경 그린 인테리어 감성을 연출했다. 식탁 위에는 귤과 제주 가이드북을 웰컴 기프트랍시고 준비해두었다고 너스레를 부렸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첫 일정은 갈치조림으로 문을 열었다. 통 갈치조림 집으로 모셨더니 매콤한 갈치조림에 해물까지 먹으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갈치조림 집에서도 역시나 제주의 음식점답게 작은 전복이 몇 개 들어있었다. 친구들 접시에 다 덜어주고 나는 안 먹어도 괜찮다고 했더니,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라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난 전복이 이제 좀 지겨워…….”라는 말에, 도민 스웩이 느껴졌다고 했다. 진짜로 제주에 내려온 초기에는 전복만 보면 이게 웬 특식이냐며 보양식을 먹는다고 젓가락질이 분주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주도에서는 해물 짬뽕에도 왕 전복이 수시로 들어가고 갈치조림, 연포탕 등등 전복 인심이 아주 후했다. 심지어 해물탕을 시키면 전복이 탕 안에도 들어가 있고, 살아있는 전복도 사이드 접시에 나와서 도민들끼리 같이 밥을 먹으면 (나는 이제 충분히 먹었으니) 서로 전복을 먹으라고 아주 전복 파티를 할 때도 있었다. 전복에서 나는 인심이 어느새 내게도 배어있었는데, 친구들은 도민의 스웩으로 해석해주었다.


 2차는 단골 이자카야에서 회와 문어 초회를 먹고, 집에 와서 또 3차로 술을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한 친구가 폐쇄된 줄 알았던 싸이월드 앱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바람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렸고, 새벽 내내 취해서 떠들고 과거 못난이 시절들 사진을 보며 깔깔대고 웃다가 잠들었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는 제주의 푸른 밤이었다. 


사절단 영접 2일 차, 육해공 특식

 둘째 날은 보말칼국수를 조식 메뉴로 정했다. 전날 하도 늦게 마시다 자는 바람에 점심때가 다 되어 일어났고, 애기 엄마가 된 친구가 제주 바다를 봐야겠다며 새벽 비행기를 타고 와서 우리를 깨웠다. 친구들과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실컷 보고, 해변가 산책길도 걷고, 모래사장에서 파도야 나 잡아봐라 놀이도 하고, 인증샷도 실컷 찍고, 나의 최애 돼지고기 구이 집에서 고기도 먹고 동문시장에서 회도 사다 먹었다. 친구님들이 기념품도 사고 싶다 하셔서 법환 포구에 기념품 샵에 모셔다 드렸더니 현무암 반지, 동백꽃 모양 초 등등 양 손 무겁게 나오며 나의 패키지여행 상품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하셨다.  


 2박 3일 동안 새벽까지 떠들어 댔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밤이면 술이 동났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조금 위로하고, 누구의 경우가 더 지랄 맞나 내기하듯이 같이 욕했다. 처음 만난 중학생 때는 서로 저 지지배는 나중에 뭘 해 먹고 사나 걱정했는데 다 자기 밥벌이하면서 각자 가족을 건사하며 살아간다. 삼십 대가 된 시점에서 인생의 과반수를 지켜봐 온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주거리는 차고 넘친다.


 제주에 사는 동안 부모님이 한번 왔다 가셨다. 아빠는 표선 쪽 리조트에 계시면서 내가 있는 집에도 한번 구경 온 적 없지만, 어쨌든 제주에 한 번 와서 맛있는 회를 사 주셨다. 내가 제주에 있으니 온다는 수많은 지인들과 심지어 우리 엄마 아들도 온 적이 없다. 나는 언제든 나의 방을 청년 쉼터로 공유하겠노라고 했음에도 말이다. 생각보다 비행기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주말 중에 시간을 내고 여정에 에너지를 내어 주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친구들이 그럼에도 와주어서 내가 살면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돼지고기 집과 생선구이 집을 함께 가고 싶었다. 차곡차곡 모은 단골집 리스트를 탈탈 털어 같이 나눠먹고,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바닷가 산책길을 함께 걸으며 나는 찍사가 되어도 좋았다. 제주에 사는 동안 놀러 와 준 네 명의 친구들,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제법 괜찮게 살고 있나 보다. 바다 건너 놀러 와 준 친구들의 방문으로 내 마음은 겨울을 이겨 낼 귤 밭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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