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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31] 우리 도시 여성이 달라졌어요

 제주에 오고 가장 크게 달라진 생활 패턴 중 하나는 쇼핑에 쓰던 돈을 아주 많이 절약하게 됐다는 점이다. 입도 초반에는 서울에서 백화점이라도 한 번 가면 정신 줄을 놓고 전쟁 전야의 피난민처럼 무언가를 샀다. 제주생활 정착기에 들어서고 백화점에 갔을 때는, 쇼핑 시간 계산에 실패해서 사려는 것을 아무것도 못 사고 터덜터덜 나온 적도 있다. 구매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에 약간의 충격까지 느꼈다. 반면 남자 친구는 이 소식을 듣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는 평소에도 무언가를 잘 사지 않는 ‘무소비’에 가까운 사람이라 내가 툭하면 무언가를 사고, 뒤 돌면 사고, 숨 쉬듯이 소비하는 것을 당최 이해하지 못했다. 


 자칭 타칭 엄마 지칭 텔레비전의 노예인 나는 보고 또 보고 영화채널을 계속 보다가, 볼 것이 없어서 홈쇼핑을 즐겨보기에 이르렀는데 제주에서는 홈쇼핑을 봐도 추가 배송비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 3천 원에서 5천 원이라고 단순히 보면 비싼 가격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물건 가격의 10%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홈쇼핑 채널도 안 보고, 원래 인터넷 쇼핑은 즐기지 않는 데다가 그놈의 도서산간 추가 배송비 3,000원이 무엇인지 괜히 사고 싶은 물건도 내려놓게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옷 한 벌 산 적이 없다. 신발 한 켤레도 산 적이 없다. 쇼핑몰이 없기도 하거니와 어디에 사러 가는 것 자체가 일이 되니, 귀찮아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그냥 잊어버린다. 서울에서 산다 해도 그걸 짐으로 싸서 들고 오는 일도 만만치 않다. 가뜩이나 제주 집에는 옷을 걸어둘 공간도 부족했다. 


 날씨나 환경 탓에 하이힐보다는 운동화에 발이 갔다. 제주는 오르막이 많아 운동화가 편하고 단화가 어울렸다. 플레어스커트는 제주바람 앞에 팬티 쇼를 하기 일쑤라, 펄럭이는 원피스는 잘 안 입게 됐다. 바닷가 바람에 기민하게 적응하려면 편안하고 꾸미지 않은 차림새가 더 멋스러웠다. 굳이 유행 따라 옷을 살 필요가 없는 곳이 제주였다.


 소극적 소비자가 되고 난 뒤에 서울은 달리 보였다. 영어 표현으로 디맨딩(Demanding) 하다는 말이 서울은 어울렸다. 발에 차이는 모든 가게, 상점들이 그랬다. 간판부터 배너, 현수막, 방송과 판매영업 직원까지, 그 물건이 없으면 세상 큰일 날 것 같은 무언의 분위기가 있다.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인생템’이 넘쳐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소확행도 어느샌가 보면 귀결점은 소비다. 서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함은, 대게 물건을 사거나 먹거나 마시는 곳들이다. 무언가를 사기에 최적화되고 편리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제주 생활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가게와 물건들이 악다구니처럼 ‘너 이것도 없어?’ 라며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귀신의 집에서 나를 놀라게 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귀신들처럼 ‘이래도 안 살래?’ ‘진짜 그냥 지나갈 수 있겠어?’라며 난무하는 소비 코드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늘 익숙해서 몰랐던 모든 편리함은 소비를 위해 지어진 인프라였다.


 와, 사는 곳이 바뀌니 내 삶의 습관 하나쯤은 바뀔 수 있구나. 예비신랑은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절약한 쇼핑머니를 항공권으로 결제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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