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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de brunch May 14. 2020

[제주일기 30] 제주 살이 부심

아침에 일어나면 보이는 한라산

 중문 오피스텔에는 큰 통 창이 하나 나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면 파란 하늘에 한라산이 보인다. 눈을 뜨면 블라인드를 걷고 한라산 끝에 걸려있는 구름을 보는 게 하루의 시작이다. 앞집에는 발을 저는 검은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문을 드나들며 동네를 돌아다니다 저녁때면 집을 다시 찾아가는 듯한데, 성큼성큼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아주 씩씩하다. 옆집에도 강아지를 키우고 동네에 크고 예쁜 강아지들도 많아서, 아침에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에는 아침저녁으로 새 지저귀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특히 오피스텔 뒷골목에 치킨 집과 고기 집이 있는데, 그 지역 전봇대에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오는 제비들로 늦은 가을까지 불야성이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정도가 아니라, 백 마리 남짓한 작은 새들이 전깃줄에 촘촘히 앉아 있다. 처음엔 전깃줄에 오돌오돌 돋은 게 알전구 인가 하고 보니 새 무리여서, 그들을 ‘알전구’라고 부른다. 치킨을 먹고 일행을 기다린다고 근처에서 서서 서성거리다간 새똥 맞기 일쑤다. 알전구들이 지키고 있는 골목은 빠르게 뛰어서 다녀야 한다. 길바닥도 하얀 페인트를 흩뿌린 마냥 새똥이 즐비하다. 새를 무서워하지만 어느 날 새들이 보이지 않으면 겨울이 왔다는 소식이다.


오토바이 타는 할망

 여자가 많은 섬답게 제주에는 할망이 많다. 할망들이 오토바이를 척 하니 타고 다다다다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다. 삶의 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보통의 일상을 마주쳤을 때 받는 에너지가 있어서일까. 모락모락 갓 만든 두부 냄새를 맡았을 때 같다. 누구의 의지나 도움 없이 저벅저벅 갈 길을 가는 할망의 씩씩함은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게 된다. 


멀리밤이면 빛나는 고깃배

 퇴근길, 오피스텔에 내가 사는 층에 내리면 복도에서 멀리 서귀포 앞바다가 보인다. 해가 지고 나면 바다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그 위에 떠 있는 고깃배 불빛만은 선명하다. 야근하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바다 위 고깃배의 점등은 묘하게 위로가 된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돼서 일까, 어두운 바다에서 선원들이 의지하고 있는 불빛이 내게도 의지가 된다. 멀리서 등대처럼 바다 위의 기둥이 되어  나를 지켜스페인 무적 함대만큼이나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느낌이다. 


집 앞에서 동료들과 술을 3차까지 마시고 집에 걸어가기

 이건 내가 술꾼이라 특히 좋은 점인데, 퇴근 후 차를 주차해놓고 동네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2차를 갔다가 시계를 보니 10시밖에 안되어 흥이 나 3차를 갔다 파해도 12시 1시였다. 물론 많은 가게들이 10시 넘어 문을 닫기도 하고, 술집이 별로 없어 강제 파하는 날도 있지만, 한참 마셔도 12시가 안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술집들이 슬슬 문을 닫으면 옆 동료의 방에 가서 남은 술과 반찬을 꺼내 4차의 문을 연다. 저녁 6시 반부터 술 마시는 시간에 집중하고 집에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술꾼에게 축복이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찾아봐야겠지만, 공기 맑은 곳에서 마시면 정말로 진심으로 잘 안 취한다. 같은 양을 마셨을 때 개가 된 날들이 서울에서 훨씬 많았던 나의 인생을 건 실험 수치로 봤을 때, 사실임에 틀림없다. 대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시면 대리를 구하기 어렵고 비싸다는 단점도 당연히 있으므로 현명하게 집 근처에서 열심히 마시면 된다. 


싱글들의 제주생활

 서울하고 자꾸 비교를 할 수밖에 없으니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면 퇴근 후 저녁을 먹거나 주말에 동료를 만나는 일이 흔하진 않았다. 아무리 친해도 서로의 프라이버시가 있을 텐데 존중해줘야 하는 선이 있었고, 선이 쌓여 보이지 않는 벽이 됐다. 제주에서는 그 벽이 얇아지고 말캉해졌다. 저녁식사를 만들다가 양이 좀 많은데 같이 먹자고 말하기도 했고, 마트 가는 길에 같이 태워달라고 하거나, 주말에 제주시에 가는 동료가 있으면 따라가기도 했다. 어차피 의지할 사람들이 서로뿐이라 더 가까워졌고 또 재미있었다. 기숙사 생활하는 고등학생들 마음이 이런 거였을까?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 안 해봐서 모름) 집에 있다가 갑자기 전화가 오기도 한다. 각자 반찬들 조금씩 가지고, ㅇㅇ네 방에서 술 한 잔 할 건데 올 수 있냐고. 치킨이 먹고 싶은데 혼자 먹긴 많으면 옆집 동료와 나누기도 한다. 회사 선배고 동료고 후배라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이 일상과 생활을 공유하는 주민이 되는 건, 은근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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