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행위일 터다. 밤이 되면 몇 개의 장면을 곱씹게 되었던 영화, <초행>에 대한 남다른 애착도 사적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2018년 1월 무렵,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의 작은 극장을 찾았던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다른 때보다 조금 늦게 M4101 버스를 탔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인해 커피는 챙기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전 커피를 준비한다는 것은 졸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커피를 사가지 못한 날은 익숙해진 좌석의 편안함에 잠겨 잠깐이라도 조는 날이 대다수였다. 다만 게으름 때문에 커피는 챙기지 못했고, 불안감과 함께 어두운 극장으로 들어섰다.
고백하자면 <초행>은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7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의 모습을 비추고,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보여준다. 흔히 극장을 찾을 때 기대하는 스펙타클은 존재하지 않는다. 느릿한 이미지가 연속될 뿐이고, 더불어 불안한 잔상만이 남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행>에 매료되었던 것은 몇 개의 이미지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일 테다. 다만 어떤 인물이나 상황에 동화된다는 것은 감정적인 피로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지난 몇 년간 영화를 볼 때마다 의식적으로 극중 상황에 거리를 두었던 것도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조건 속에서 <초행>에 동화되었던 것은 일종의 필연성이 동반된 우연임이 분명하다. 그날 나는 <초행>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스크린을 응시한 순간 그 영화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유독 두 개의 장면이 아른거린다. 아마도 그 장면이 특별하게 남겨진 것은 인정하기 싫을지라도, 내 자신과 무척 닮은 점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결혼을 앞둔 수현(조현철)과 지영(김새벽)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 중 하나이다. 통화를 마친 수현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아버지의 환갑이 다가옴을 알린다. 지영은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뵈러가는 것을 권하고,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는 분명히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이 대화에서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괜한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괴리감의 원천은 대화에서 생략된 무언의 이야기들로부터 시작된다. 대화는 무척 빠르게 매듭 맺어지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환갑에 대한 수현과 지영의 구체적인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둘의 의도적인 회피임이 분명하다. 결혼을 앞둔 둘에게 있어, 해결해야할 문제는 너무 많다. 아버지의 환갑 또한 그 문제들 중 하나일 것이다. 더불어 이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여력조차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굳이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은 채, 그 문제를 미완의 상태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비가시적인 상황이 눈앞에 그려진 것은 이 문제가 비단 수현과 지영만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일 터다.
두 번째 장면 또한 일종의 생략이 동반된다. 다만 이번에 생략된 것은 앞선 장면과 완전히 다른 성질을 내재한다. 영화가 끝날 무렵 양가의 부모님을 뵙고, 서울에 도착한 수현과 지영이 취하는 행동은 함께 걷는 것이다. 여전히 어떤 문제도 해결되진 않았지만, 그들은 손을 부여잡고 앞을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그들은 뒷모습만을 보여준 채 한참을 걸어가고, 화면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이 장면은 <초행>에서 가장 동적인 순간임이 분명하다. <초행>은 이들이 함께 걷는 것에 대한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들은 결혼이란 문제에 있어 스스로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초행>을 마주하고 5년이 지났지만, 극장의 스크린을 비추는 입자들 사이로 그들이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날 극장은 몹시 조용했고, 슬픔도 기쁨도 아닌 묘한 감정은 나의 신체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몇 주 전 나 또한 첫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무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옆에 있는 그 사람과 함께 나아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