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의 사적인 순간들이 성취한 것들
그녀는 몇 개의 이미지를 보여주곤,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다. 아니 아마도 그녀는 동생을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일 테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발화가 불가능하기에, 혹은 발화가 가능하더라도 누구도 동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이미지의 힘을 빌려, 아주 천천히 사적인 순간들을 카메라로 찍어낸다. 장혜정과 장혜영의 <어른이 되면>이 어떤 특별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은 채, 단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미지로포착해냈을 뿐이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이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던 것은 이 순수한 이미지 덕분이 아닐까. 우선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등장한 영화들을 되돌아봤을 때, 영화의 좋고 나쁨을 떠나 무언가가 이미지를 쫓아다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들은 지독하게 이미지를 쫓아다니고, 서서히 이미지를 잠식시켰다. 그것들로 인해 영화의 이미지가 내재한 그 자체의 순수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정치성과 스펙타클. 심지어 그것들은 때때로 영화를 집 어삼키기도 했다. 영화는 소멸되고 정치성과 스펙타클만이 존재하는 기이한 형체. 어쩌면 몇 몇 영화는 그 관계가 완전히 뒺비어져 오히려 정치성과 스펙타클을 위해 복무하는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에서 나에게 그런 인상을 남겼던 것들이 어떤 것인지 구구절절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다.
다시 돌아가 <어른이 되면>이 포착해낸 사적인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자면 그 이미지들은 사적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이고 스펙타클하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내재한 정치성과 스펙타클은 단지 영화 자체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다. 다수의 관객들은 대상으로 하는 영화는 그 대중성으로 인해, 무엇을 하건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스펙타클하다. 암실의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들은 우리를 마주한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 속에 그 이미지를 응시하는 것 밖에 없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또한 영화는 우리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의 이상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눈은 우리보다 정밀하다. 덧붙여 몽타주 된 이미지들은 시간을 응축함으로써 파노라마를 전시하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스펙타클함을 내재한다. 그러나 그 영화는 딱 거기까지일 뿐이다. 그 이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채, 그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그대로 포착해낸다. 카메라는 그렇게 아주 순수한 형태의 이미지를 포착해낸다. <어른이 되면>을 접한 순간 지난 몇 달간 느끼지 못했던 반가움을 느꼈던 것도 분명 이이 순수한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마치 몇 달 만에 마주하는 엄마의 된장국 같은 느낌이랄까. 그 영화는 지난 몇 달간 마주한 영화 중 가장 순수한 의미의 영화였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 영화가 내재한 순수한 이미지들을 ‘재현할 수 없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싶다. 그 이미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포착이고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이미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혜정과 혜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의 공간에 있었을 뿐이고, 카메라는 우연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순간 카메라는 그녀들의 일상에 내재한 온갖 우발성과 불안감마저 그대로 흡입해낸다. 그 이미지가 다른 영화들과 달리 엉성하고 삐툴삐툴한 구도를 취했던 것도, 이 세계에 위태롭게 놓여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그대로 인화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미지는 어떤 과장과 거짓말도 보태지 않은 채 그녀들을 포착해낸다. 아마 그녀들의 모습 아마 그녀들의 모습을 그대로 인화해낸 가장 명백한 이미지는 카메라가 뒤집어진 순간들일 것이다 . 예상할 수 없었던 이유로 카메라는 뒤집어졌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작동을 멈추지 않은 채 위태로운 그녀들을 포착해낸다. 스티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찍을 수 없던 혜정은 눈물을 흘리고, 혜정과의 갈등 과정에서 카메라는 뒤집어진다. 카메라는 혜정을 바라볼 수 없다. 비틀어진 카메라는 혜정의 너머에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뿐이다. 또한 바비큐장의 의자는 혜정과 친구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다. 함께 비틀어진 카메라는 그녀의 주변에 흩뿌려진 야채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 이미지들은 그녀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 이미지는 이 세계와 불화하는 그녀들의 우발적인 상황을 인화했을 뿐이다. 그녀들의 직접적인 모습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 이미지에 인화된 사물들은 세계와 불화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상상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인위적으로 클로즈업했던 순간들은 <어른이 되면>에서 가장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미지들일 테다. 그 이미지들은 그 영화가 내재한 순수함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들로부터 여전히 어떤 순수함을 느꼈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심지어 괴리감이 느껴졌던 그 이미지는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이미지들은 세계와 불화하는 그녀들의 얼굴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했던 시도는 아니었을까. 혜정은 사람들 앞에서 미소를 머금은 채 춤을 추고 노래하며, 카메라는 멀리서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도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는 것은 혜정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들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함으로써, 냉혹한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카메라는 이 세계와 화해를 시도하는 그녀의 얼굴을 놓칠 수 없다. 카메라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포착하기 위해, 렌즈의 줌을 당겨야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이미지들은 위태롭다. 카메라는 세계와 화해를 시도하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 줌을 당겼지만, 역설적으로 세계는 비틀어졌다. 과도하게 줌을 당긴 렌즈로 인해 공간은 압축되었고, 그녀가 해맑게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세계는 이질적이다. 이 세계는 잔인하게도 그녀의 화해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가 노래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 것과 동시에 어떤 씁쓸함이 느껴졌던 것도 이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화해하고자 하는 혜정과 혜영의 시도는 여전히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 영화의 마지막은 미소를 머금은 채 노래하는 혜정의 얼굴을 담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흘러 새해가 되었고, 혜정과 혜영 그리고 친구들은 식탁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떡국을 먹는다. 그녀는 그렇게 한 살을 더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혜영과 함께 지낸 6개월 동안 스스로 고기를 써는 것과 밥을 하는 것도 배웠다. 그렇게 혜정은 이 세계 속에서 천천히 어른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