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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돌이 Dec 19. 2021

그 도시는 비가 내려야만 했었다.

동시대 일본 영화가 버블 시대 이후의 청춘을 그려내는 방식들

0. 피아노 치던 그 소년에게     

구로사와 기요시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하나 떠올린다면, <도쿄 소나타>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아마도 그 영화가 떠오른 것은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이 남긴 여운과 어떤 가능성 때문일 테다. 한 가족을 통해 버블 시대 직후, 우울한 일본의 사회상을 그려낸 <도쿄 소나타>는 끊임없이 죽음의 이미지가 드리우는 영화이다. 일자리를 잃은 채, 검은 양복을 입고 무료 배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다수의 중년들.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두운 바다로 뛰어들려는 어머니.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어두운 구치소에 수감된 소년. 이들 외에도 시대적인 우울감이 인물들의 신체를 지배해버린 나머지, 영화 속 인물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닥을 응시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소나타>가 기요시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동안 축적되었던 우울감을 완전히 해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는 소년의 자태는 한없이 우아하고, 소년의 몸짓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피아노 소리는 그동안 축적된 불안감들을 걷어낸다. 아마도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 장면이 <도쿄 소나타>의 가장 긴 테이크인 것은 그 장면이 내재한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기요시는 시대적인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그 장면을 가장 길게 보여줘야만 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카메라 또한 소년의 연주에 매혹되어 너무 오래 그 소년을 바라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의 연주가 마무리될 즈음 그의 부모는 소년에게 다가간다. 화해의 제스처로 아버지는 소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이내 그들은 그 공간을 벗어난다. 주변의 사람들은 어떤 미동도 없이 단지 무표정으로, 소년과 그의 부모가 퇴장하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곧이어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오고, 어떤 불안감이 잔존한다. 소년은 그토록 바래왔던 피아노를 배움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동시대 신진 감독들이 제작한 일본 청춘 영화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소나타>의 소년은 유년 시절에 버블 경제의 붕괴를 겪은 상징적 인물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동시대에 청춘을 소재로 연출하는 젊은 감독인 이시이 유야, 하마구치 류스케 또한 그 우울한 시기를 겪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는 청춘들의 모습은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들이 목도했던 그 우울한 시기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쩌면 그 청춘들의 모습은 <도쿄 소나타>의 소년이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모습의 등가물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추론이 합당하다면 이들의 영화를 살펴봄으로써, <도쿄 소나타>에서 미완으로 남겨진 소년의 이후 삶에 대해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몇몇 영화는 두 가지 공통점이 반복된다. 첫째는 도쿄라는 외로운 공간에서 영화의 서사가 전개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흐린 날씨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에 그 도시가 내재한 고독함이 분명히 존재하고, 비가 내렸던 몇몇 장면들은 강렬한 기억을 동반한다. 그 도시에서 비가 반복되는 것은 영화가 동시대의 청춘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만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1. 도쿄에서 살아가기망각과 거짓말     

우선 두 감독의 영화가 그려내는 청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섣부르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애초부터 도쿄라는 공간은 청춘들에게 쉽게 안락함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내는 청춘들의 밤이 낮보다 아름답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그들은 이 불편한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들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이시이 유야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모종의 이유로 홀로 도쿄에서 살아가는 젊은 두 남녀, 신지(이케마츠 소스케)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삶을 그려낸다. 도쿄라는 공간은 이들을 외롭게 만들 것이다. 도쿄의 살인적인 물가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선택권이 있다면,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이 수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죽음뿐이다. 즉 그들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도쿄에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혹은 도쿄에서의 지독한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도쿄라는 공간은 살아간다는 표현보다 견딘다는 표현이 어울릴 테다. 이때 그들이 그 도시에서 견디기 위해 택하는 기술은 망각이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견디기 위해 모든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 그들에게 있어 일상이 진행되는 낮은 인고의 시간이라면, 밤은 망각의 시간임이 분명하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낮 시간의 인물들은 표정을 빼앗긴 채 무표정밖에 지을 수 없음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반해 밤은 그들이 잃어버린 표정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다. 밤은 그들에게 있어 망각의 시간으로, 비록 작위적일지라도 간간히 어렴풋한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망각의 제스처로 택하는 행위는 술과 음악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걸즈바에 방문함으로써 타자의 온기를 사는 행위이다. 그때나마 그들은 잃어버린 표정을 되찾을 것이고, 그래야만 내일의 일상을 견뎌낼 수 있을 테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청춘들은 망각의 기술을 통해 도쿄에서의 삶을 견뎌낸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아사코>의 청춘들은 망각과 거짓말을 혼용함으로써 그곳에서의 삶을 견뎌낼 테다. 얼핏 보면 이 두 방식은 거리감이 있어 보이지만, 이들에게 있어 망각과 거짓말은 결코 그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망각이란 스스로 자신을 속인 채 그 삶을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거짓말이란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나(에모토 타스쿠),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라는 세 남녀가 함께 했던 한 해의 여름을 쫓는다. 그해 여름, 그들의 삶은 권태롭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들의 낮은 도쿄에서의 삶을 존속해나가기 위한 노동, 어쩌면 무의미한 반복일지도 모르는 권태로움으로 이어진다. 무의미한 반복이라는 표현은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 노동이란 불편한 그 도시에서의 한 달을 이어가기 위한 행위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들의 잔고는 여전히 같은 숫자에 수렴하고 있을 것이다. 섣부른 확언이길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자본의 논리를 착실히 순응하는 도쿄라는 도시에서 그들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노동의 반복과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대척점 사이에서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밤의 일탈이다. 그들에게 있어 밤의 일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밤의 일탈을 통해 무의미한 노동이 반복되는 삶을 망각해야만, 그 도시에서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일탈은 망각의 기술로, 도쿄라는 비정한 도시에서 견뎌내는 일종의 생존법이다. 다수의 평자들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클럽신이 내재한 생기에 매혹된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클럽이라는 공간은 망각을 취하기 위한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어두운 조명에 간간히 비치는 그들의 얼굴은 적당한 익명성을 보장할 것이고, 그 공간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애초부터 후일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들은 망각이 최적화된 이 공간에서 취기가 신체에 스며든 채, 음악의 리듬에 몸을 맡길 것이다. 이는 그 도시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망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얼굴에 돌아온 생기로, 클럽 신의 마지막 무렵 세 남녀의 얼굴이 부각되는 쓰리 샷은 아마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지독하게도 현실은 그들에게 전날 밤의 여운을 곱씹을 틈조차 주지 않는다. 취흥이 사라진 후 피로감은 그들의 신체를 감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한 직장인들은 그들에게 묘한 박탈감을 선사한다. 그들이 박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수단은 거짓말이다. 다만 이는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이 박탈감을 수긍해야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박탈감을 수긍하는 것은 그들이 그 도시에서 도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도시에서 견뎌내기 위해, 거짓말은 그들의 일상 속에 스며든다. 

영화에서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가장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인물은 ‘나’일 것이다. 그가 가장 명백하게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은 사치코에 대한 마음이다. 그는 사치코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때때로 사치코가 둘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하기 위해 운을 띄우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며 쿨한 인간인척 행세할 뿐이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거짓말을 반복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일 터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때, 그 여름을 함께 했던 세 남녀의 관계가 어색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물론 그의 두려움은 단지 어색함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의하기에 복합적인 이유가 작동할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거짓말이 결코 그 셋의 관계에 있어 좋은 결말을 낳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이미 시즈오와의 교제를 결심한 사치코에게 나가 고백을 한 순간, 그 셋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그 여름과 달리 외로운 도쿄의 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은 다르지만 거짓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도시에서 삶을 존속하고자 하는 것은 <아사코>또한 마찬가지이다. 우선 영화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사코(카라타 에리카)의 첫 사랑인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 갑작스럽게 잠적한 후,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와의 만남을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아사코>의 서사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쿠와 료헤이가 마치 도플갱어처럼 거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은 단지 앞선 이유만으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사코는 모종의 이유로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김으로써, 료헤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다만 그녀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아사코에게 있어 료헤이와의 만남이 가능했던 전제는 그가 바쿠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연인의 관계에 있어, 그녀의 입을 통해 료헤이에게 결코 밝힐 수 없는 사실이다. 

아사코의 거짓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선 그녀의 얼굴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영화의 서사가 아사코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분명히 고집스러울 정도로 아사코의 얼굴에 집중한다. 매 신의 사건이 진행될 때마다, 그 사건에 대한 리액션으로 아사코의 클로즈업해야만 영화는 진행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아사코의 얼굴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무표정의 얼굴이고, 두 번째는 생동감의 얼굴이다. 바쿠와의 만남으로 구성되는 1부에서 아사코는 생동감의 얼굴을 보여준다. 1부에서 그녀는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는 바쿠를 두고 걱정하는 얼굴을 짓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가만히 있어도 볼이 빨개진 채 웃음이 새어나오는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1부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구성되지만, 그 시간동안 분명히 그녀의 얼굴은 입체적이다. 반면 2부에서 그녀의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으로 구성된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영화의 바쿠를 조우하기 전까지 그녀의 얼굴은 거의 대부분 무표정의 상태이다. 심지어 료헤이를 처음 만난 그 순간도 그녀는 바쿠와 닮은 그 얼굴을 보고 무표정을 지을 뿐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 무표정이라는 표현보다 표정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바쿠와의 이별은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바쿠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사라졌고, 사라진 바쿠 앞에서 그녀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표정을 잃어버린 것은 그 트라우마의 결과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그녀가 료헤이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 트라우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그녀는 료헤이를 통해 바쿠의 빈자리를 채움으로써, 과거의 트라우마를 망각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들을 돌이켜 봤을 때, 비록 그 결은 다르지만 공통된 문제에 직면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영화가 그려내는 도쿄의 청춘들은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난처한 상황 혹을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결코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두 번째는 그들이 그 상황을 망각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한들 완전한 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아사코>에서 갑작스럽게 바쿠와의 조우가 일어난 것처럼, 그들이 그토록 망각하고자 했던 기억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그들을 찾아올 것이다.   

        

2. 그 도시에 비가 내린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망각하고 싶었던 기억들이 필연적으로 다시 상기될 수밖에 없다면, 그들에게 행복은 결코 허락되지 않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능성이 잔존하다면, 아마도 비정한 그 도시에 비가 내렸던 순간들일 것이다. 그 도시에 비가 내리는 순간, 우울감이 감싸는 그 도시는 미묘한 균열이 발생한다. 마치 비가 그 도시의 우울감을 씻겨 내리기라도 하듯이, 그 순간 공교롭게도 그들의 얼굴은 생기를 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그들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망각의 결과물로 얼굴에 생기를 회복하는 것과 질적으로 명백한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후자가 과거와 현실을 회피함으로서 생기를 얻는 것이라면, 전자는 과거와 현실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생기를 내재한다. 어쩌면 그 도시에 비가 내리던 그날, 그 도시의 청춘들은 스스로 어떤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에서 비가 내렸던 순간은 신지와 미카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가 약속된 날이다. 갑작스러운 비로 인해 신지는 우산도 없이 그녀를 향해 뛰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결코 그의 얼굴에 난감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을 씰룩거리는데, 이는 이전까지 그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다. 비가 오는 그날, 얼굴에 새로운 표정을 담아내는 것은 신지뿐이 아니다. 신지로부터 작은 머리핀을 선물 받은 미키는 고맙다는 말을 거듭 반복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다. 괜스레 그의 가방 끝을 잡은 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입과 코를 쭈뼛거릴 뿐이다. 아마도 그녀의 그 얼굴은 수줍음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 도시에서 견뎌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던 그녀에게, 그 순간은 너무 소중하다. 이는 그녀의 삶에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그 순간 그녀는 단지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하는 것인지 알지 못할 뿐이다. 비가 왔던 그날, 그 둘은 분명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도시에서 견디기 위해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나을 것이라는 걸.

<너의 새는 노래 할 수 있어> 또한 그 도시에 비가 내리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너의 새는 노래 할 수 있어>는 비가 내리는 순간들이 몇 차례 반복된다. 그리고 그 순간들마다 이들은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얼굴들을 보여준다. 하나의 우산을 들고 장난치는 세 남녀의 얼굴은 장난기로 가득 차 있고, 마치 아이와도 같은 그들의 얼굴은 충분히 아름다워 보인다. 다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면, 그건 비 오던 그날 사치코를 마중하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이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들의 얼굴이 생기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순간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거짓말에 급급한 나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자, 사치코에게 온전히 마음을 전달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 순간조차도 직접적인 언어로 그 마음을 전달하진 못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그녀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본다. 여기에서 이마에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섹스와 키스 같은 신체의 교류와 다른 의미를 내재한다. 전자가 사치코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다는 아쉬움과 사랑의 문제라면, 후자는 그들에게 있어 어떠한 감정적 교류가 존재한다기보다 신체적 욕구를 해소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사치코에게 언어로서 직접 마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지만, 결코 이전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터이다.

비가 내리는 순간 거짓말을 뒤로 하고, 비로소 진실된 감정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사코 또한 마찬가지이다. 갑작스럽게 바쿠를 쫓아갔던 아사코는 되돌아온 뒤, 료헤이에게 두 번의 사과를 시도한다. 첫 번째는 해가 떠있던 순간이고, 두 번째는 비가 내렸던 순간이다. 이는 단지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문제이다. 해가 떠있던 순간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표정 없는 얼굴로, 료헤이에게 형식적인 사과를 건넬 뿐이다. 사실 이들의 관계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료헤이는 애정을 갈구하지만, 그 리액션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무표정인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는 분명히 1부에서 그녀가 바쿠와 함께 있을 때 보여주었던 그 얼굴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반해 비가 내리고 아사코가 두 번째 사과를 건네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이전까지 료헤이와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던 표정을 담고 있다. 그 얼굴에는 미안함과 절박함을 비롯하여 다수의 감정들을 담고 있으며, 그 복잡한 표정의 얼굴은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진실된 얼굴이다. 료헤이가 그녀의 두 번째 사과를 받아들이는 듯한 스탠스를 취했던 것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을 마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능성이 잔존한다고 느껴지는 것은, 비로소 이들의 관계에서 온전한 진심을 고백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도시에서 비가 내리던 그날, 그 청춘들이 발견한 것은 행복의 가능성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그 가능성은 망각과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빌리지 않고, 현실을 마주한 채로 발견해낸 것이다. 다만 그 도시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이를 그 도시로부터 지켜내는 것 또한 쉽지 않을 터이다. 그들은 그 가능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3. 비가 내린 뒤상실의 세대에게 남겨진 것들     

버블의 붕괴를 유년 시절에 직접 겪었던 이시이 유야와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려내는 청춘들의 모습은 상실의 세대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청춘의 모습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시대적인 우울감으로 인한 청춘의 결핍을 숨기지 않는다. 그 결과물로 그들이 그려내는 청춘의 모습은 금전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혹은 그 외의 어떤 것을 상실해버린 채, 공허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의 세대를 그려내는 이 두 감독의 영화를 봤을 때, 연민의 감정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앞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도시에서 견디기 위해 어떻게든 사투하는 청춘들의 모습에서 숭고함을 발견했기 때문일 테다. 여기에서 숭고란 이미지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느껴지는 어떤 울림으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내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두 감독의 영화가 그려내는 청춘의 모습은, 마치 청춘이 아름답다는 듯이 꾸며내기에 급급한 표면적인 이미지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영화에서 숭고의 감정이 가장 명백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 도시에서 비가 내렸던 순간들이다. 이는 단지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한 어떤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비가 내리는 순간, 그 청춘들은 항상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이란 특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청춘들은 상실된 무언가를 되찾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평범함 속에서 그들이 삶의 행복을 태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 도시에 비가 오던 그날, 신지와 미카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기 시작했으며, 나와 아사코는 사랑하는 이에게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변화는 결코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 변화는 아주 미약하다. 다만 그렇기에 숭고할 것이다. 애초부터 타자와 온기를 공유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그 도시에서, 미약한 가능성을 약동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비정한 도시로부터 그 미약한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사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투의 결과물로, 어쩌면 그 차가운 도시에 약간의 온기가 잔존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비라는 촉매제임이 분명하다. 다만 비가 내리는 그 날씨가 어떻게 그 가능성을 발현시켰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어떤 답도 이 의문을 명쾌하게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비라는 것은 인간 세계의 논리로 규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문학적 개념을 빌려 답을 내린다 한들, 이는 피상적인 답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답을 내려야한다면, 비가 내리고 어떤 가능성이 발현된다는 것은 이 세계가 어떻게든 그 도시에 온기를 붙잡으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하면서 <도쿄 소나타>의 그 소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제작 된지 10년이 조금 넘게 흐른 현재,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 소년은 20대 중반 즈음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소년의 현재 삶 또한, 이시이 유야와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려낸 청춘의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 소년 역시 버블 시대의 붕괴와 함께 무언가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소년은 금전적인 이유로 피아노를 그만뒀을지도 모르고, 또다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 또한, 비정한 도시에 비가 내리던 그날 어떤 가능성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가능성 속에서 발견한 온기를 그 도시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을까. 그 소년의 삶은 불행할 것이다. 다만 그는 불행 속에서 잔존하는 미약한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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