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왜 치히로는 이름을 잊으면 안 됐던 걸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

by 텔리

※본 게시물은 영화 <센과 치히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외딴 시골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주인공 치히로네 가족. 새로운 집으로 향하던 중 치히로네는 길을 잘못 들어 오래전에 폐허가 된 테마파크에 도착하게된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맛있는 냄새를 따라 우연히 문을 연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낮에는 테마파크였던 곳이 밤이 되자 신들의 세상으로 변하고 치히로의 부모는 식당 주인의 허락 없이 음식을 먹다 돼지로 변하고 만다. 치히로는 그런 엄마 아빠를 구하기 위해 테마파크 중심에 위치한 목욕탕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쩐 일인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소년 하쿠를 만난다.



※ 글을 시작하기 전 나는 목욕탕 직원들을 요괴가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내가 그들을 인간 혹은 사람으로 지칭하더라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이름을 잊으면 벗어날 수 없는 터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언뜻 보면 영화가 ''과 '치히로’ 두 사람의 행방불명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제목이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이라는 이름은 주인공 소녀가 목욕탕에서 일하기 위해 가지게 된 예명이고, '치히로'는 그의 본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두 이름을 모두 제목에 넣을 만큼 이름이라는 장치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영화의 대사에서도 "이름을 잊으면 안 돼"라든지 "좋은 이름이구나"라며 이름이라는 키워드를 거듭 강조했으니 말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장치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지만 고유의 이름을 통해 '전한별' 혹은 '제니퍼'등의 개인으로 구분된다.


단순히 '인간'으로 묶이는 나는,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75억 개체 중 하나다. 미국에 있는 제니퍼나 프랑스에 있는 엠마나 그리고 한국에 사는 전한별이라는 '인간'이나 동물계 영장류에 속하는 인간종으로 보자면 모두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고유한 이름 '전한별'과 같이, 본인의 이름으로 정의되는 '나'는 단순한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생물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전한별'만의 삶에는 다른 인간들과는 구분되는 고유한 생활과 인간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전한별'은 미국의 '제니퍼'와도 다르고 프랑스의 '엠마'와도 다르다.




목욕탕의 주인 유바바가 지어준 이름, ''은 고유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이다. ''의 삶 안에는 노동 이외에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지점에서 ''으로서의 삶은 목욕탕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치히로'는 타인과 구분되는 그 자신만의 인생이 담겨있다.'치히로'의 삶은 엄마 아빠를 구해내 무사히 돌아가겠다는 목적과 도시에 두고 온 친구들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소망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결국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개개인 고유의 삶이 사라지고 자본의 도구로만 전락한다. 그렇기에 철저한 자본가인 '유바바'는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의 이름을 빼앗는다. 직원들이 그들 본래의 이름을 계속해서 자각하고 있다면, 본인이 목표한 돈을 어느 정도 모은 후, 원래 삶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잊어버린다면 계속해서 노동자의 감각만 유지한 채 목욕탕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유바바에게 안정적인 노동력의 공급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목욕탕 식구들 중 인간과 가장 비슷한 형상을 한 캐릭터는, 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동료 '린'이다.

"언젠가 돈을 모아 바다 건너 마을에 살 거야"라고 내뱉는 '린'의 소망이 인간다움을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돈'이 목적이 아닌 돈을 통해 이루어 낼 개인의 '목표'가 있어야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름을 잃지 않아야 본래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름은 단순히 기억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이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호명해 줄 타인이 필요하다. 주인공 '센'은 처음 만난 이들에게 먼저 이름을 물어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다. 직원들을 잡아먹고 난폭해진 가오나시 앞에서도 센은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렇게 센의 호명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해 간 이들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센이 하쿠의 본명을 떠올려줌으로써, 하쿠는 자신의 본원인 '코하쿠'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센의 모험에 함께하게 된 가오나시는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족 제니바를 만나 함께 살아가게 된다.


터널 안에서도 타인을 끊임없이 부르는 센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그 자신을 터널 밖으로 이끌어냈다. 센의 호명을 통해 정체성을 찾은 이들이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센의 부모님을 되찾는 일을 도와준 것처럼.


노동에도 휩쓸리지 않을 인간의 존엄성




부모를 구하기 위해 목욕탕에 취직한 센이지만 그는 본인의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 센이 여타 목욕탕 직원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손님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물신으로 오해받던 강의 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 오염으로 인해 고통받은 신의 육신에서 쓰레기들을 빼낸다. 단순히 물을 끼얹고 욕탕에 물만 부으면 그만인 본인의 직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진지한 자세로 손님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주었다.

손 안에서 황금을 마구 만들어내는 요괴, 가오나시 앞에서도 센은 황금을 얻어내고자 급급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넌 어디서 왔니?. 부모님이 어디 계셔?"라는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필요 없는 물음을 던진다. 인간이 도구화되고 수단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결여되어버린, 인간 근원에 관한 질문을 센이 던진 것이다. 가오나시는 얼굴 없는 요괴, 즉 완전히 인간 존엄성을 잃어버림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가오나시에게 던진 센의 질문은 가오나시로 하여금 그 본인이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핵심적인 물음이었다.


센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한 가오나시는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와 제니바의 집에서 돈을 위한 노동이 아닌 친구들을 위한, 사람을 위한 노동을 하기 시작한다. 가오나시는 생쥐로 변한 유바바의 아이 '보'와 작은 파리로 변한 유바바의 부하와 함께 물레를 돌려 센을 위한 작은 머리끈을 만들어 선물한다.가오나시는 친구를 위한 일을 함으로써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됐다.




영화 <센과 치히로>는 노동이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센'과 '치히로' 두 가지 이름이 제목 안에 들어있듯 우리의 삶에선 노동과 개인의 삶 모두가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를 보아도 노동은 우리네 삶에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렇다면 노동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까. 그 질문에 감독은 '사람'과 '사람'사이 흐르는 따스함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한다. 서로의 안부, 근원, 꿈을 묻고 대답해 나가는 것. 그 과정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것. 그것들이 자신의 이름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또한 노동이 자본 그 자체를 위한 노동이 아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일으로 이어질 때의 노동이 가장 가치 있게 됨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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