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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 Jul 29. 2020

커피한잔. 그것은 인생의 맛.

나를 발견하는 시간

나의 커피사랑이 몇 살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의 예쁜 찻잔에서 손톱만 한 티스푼으로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끌어올린 커피 한 모금이 내 혓바닥에 닿던 그 순간은 정확히 기억난다.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달콤 씁쓸한 그 맛은
내가 인생의 맛을 보기도 전에 나를 매혹시켰다.

그 맛은 나름의 공식도 가지고 있었다.

둘. 둘. 둘.

나에게 커피의 황금률은
커피, 프리마, 설탕

둘둘둘
간편하면서도 외우기 쉬운 그 공식은
20대까지 나를 매혹시켰다.

쓴맛 뒤에 가려진 달콤함이 좋았던 건지
달콤함 뒤에 가려진 쓴맛이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20대 내 인생은 믹스커피처럼 쓴맛보다는 달콤함으로 가득했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마음 한편에도 스산한 기운이 스치는
계약직 교사였지만, 그래도 난 젊었고 자신이 있었다.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보다는
어디를 가든 씩씩한 봇짐 장수로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한 20대였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고 생기발랄했던 나는
교무실에서도 식사 후 커피 한잔 하실 분~~ 을 남발할 만큼
에너지도 자신감도 넘쳤다.

그리고 같이 커피 한 잔을 할 사람도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바뀐 뒤,
내 이름 석자 뒤의 호칭은 선생님에서 신부님으로
신부님에서 산모님으로 바뀌더니

이내 이름 석자가 서서히 지워졌다.

놀이터에서도 내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게 익숙해진 30대 중반 애 둘 엄마.

지워져 가는 이름처럼 나의 시간도 나의 마음도 취향도 서서히 지워져 갔다. 자신감은 애초에 바닥을 뚫고 지나

나의 깊숙한 내면을 마주하기도 여러 번.
그렇게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아이들에게 맞춰져 갔지만
단 하나, 아이들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있었으니
그것은 커피.
커피는 육아에서 노 키즈존 같은 영역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잔, 커피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비록 내 육체는 주방 한편에 묶여 있을지라도 영혼만큼은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내 인생의 농도가 그렇게 점점 달콤함이 가시고 쓴맛 기운이 강하게 올라오니 미각마저 눈치를 챈 건지 커피 취향도 바뀌기 시작했다.



원두 콩을 사다가 수동 그라인더로 돌돌 갈아서는
종이 필터로 내려먹는 커피의 맛이란,
알고 나니 깊이가 다른 맛이었다.

안녕 칼리타씨:) 반가워♡



어른의 세계란 이런 것이었나.

단맛은 빠졌지만 잘 고르고 잘 갈아내면 깊이 있는 그 맛은 둘둘둘의 공식을 고집하던 나의 미각을  둘리를 보던 시절로 보내버렸다.

달달한 믹스커피만 고집하던 내게
신랑은 이제 커피맛을 알아간다고 이야기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인생의 맛을 알아가는 것이다.
쓰지만 거부할 수 없는 깊은 맛.

고소한 맛.


하루 종일 밀리는 집안일, 5살 2살 아이들의 손발이 되는 일에 대한 내 감정이 행복함인지 힘겨움인지를 결정하는 건 한 끗 차이었다.

언제나 그 한 끗은 나의 컨디션.

커피는 한 끗을 두고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는 내 감정들 사이에서 언제나 나를 나답게 만드는 역할을 해주었다.


기력이 다해 몸과 마음이 바닥에 기어 다니고 싶을 때에도
카페인 한 모금으로 겨우내 힘을 쥐어짜 냈다.
마음이 바닥을 치고 넋 놓고 울고 싶은 날에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두고선 근처 커피집으로 뛰어갔다.
온전히 나를 마주하는 시간,

커피 한잔이 위안을 주었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답답할 때는 시원함을

추울 때는 마음을 데워주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 번은 나를 비워야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 한 번은 육아하는 시간이다.


육아를 하며 나는 매일매일 나를 비운다.
그리고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채운다.
매일매일 비우고 채우는 일은 보람 있지만
때로는 고단하고 힘겨운 일이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태울 때마다 커피는 내게 연료가 되어준다.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서 마주한 명문장.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처럼

육아에서 더 이상 해결책을 찾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하루하루 내 감정에 집중하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시간을 파괴하며 보낼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행복과 추억을 창출해내기로 했다.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는 힘, 고단한 시간들을 견뎌내는 힘을 만들주는 건 언제나 한잔의 커피.


''인간의 행복은 자유 속에 있지 않고 의무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하기에 나는 오늘도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기보다는 '엄마'로서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즐길 것이다.


이따금씩 커피 한잔과 함께라면 
크게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커피가 제일 맛있는 순간,  내 인생이 가장 맛있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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