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연산 Nov 28. 2023

믿고싶은것 하고싶은것 보고싶은것

복도많지 


몇 주 일을 다녀왔다. 며칠 후 또 들어간다. 일 특성상 핸드폰을 못 쓴다. 이번 일이 얼추 끝나고 핸드폰을 받고서는 순간 어떻게 작동시킬지를 몰라 벙 쪘다.


핸드폰이 없으면 뭘 하냐. 일이 끝나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질리면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나 VOD에 있는 무료영화를 봤다. 그 중 '찬실이는 복도 많지' 라는 영화에서 그런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우리가 하고 싶은 거, 우리가 보고 싶은 거'. 그 말에 꽂혀  다른 대사에서마냥 깊이깊이 그것만 생각했다. 추리고 나니 내가 쓰고 싶은 거, 추고 싶은 거, 사랑하는 거. 라고 살짝 바뀌어, 밤에 혼자 담배를 피다 달이 보이면 나지막히 중얼대기도 몇 번 했다.


쓰고 싶고 추고 싶다. 머릿속이 미친년 꽃밭이래도 쓰고 싶긴 하다. 한 달쯤 전, ADHD 판정을 받았다. 더 자세한 검사를 해봐도 된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2년 내내 날 차근히 본 의사가 얘기한 것이니 돈을 내고 검사를 해봐야 결국 나의 고장을 돈을 들여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터다. 일하다 뭘 까먹거나 실수하거나, 일이 끝나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빨랫거리나 담배를 찾는다던가 하던 것들, 그냥 삶에 내가 저질러온 모든 실수나 어색한 순간들이 나의 ADHD 때문일까 싶어졌다. 영화를 보면서도 딴 생각을 하고 책을 읽어도 문장이 조각나거나 딴길로 새는 집중력이 다 ADHD 탓인가 하면서도, 그래도 쓰고 싶고 추고 싶다고 했다. 혼자밖에 들을 길 없는 날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렇게 생각이 났다.


담배를 피우다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 무용수라 대꾸했다. 하루 식비가 900원이었다 했다. 다X소에 가서 900원짜리 팩 육개장을 가끔 사먹었고, 고시원 밥과 라면을 챙겨먹었다 했다. '청춘이네'라는 상대의 말에 속으로 청춘이 아니라 그냥 천치입니다, 라고 대꾸했다. 그 시절로 돌아갈 거냐는 질문을 물을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선수를 쳐서 그러마고, 대신 좀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했다. 


쫒겨났던 어영부영 흐지부지 나왔던, 소속이 되지도 못했던간에 나는 춤을 추는 사람이다. 정확히 누가 기다려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번 독촉 같은 '작가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받아도 나는 쓰는 사람이다. 무용수이고 작가이다. 작가이며 무용수이다. 이쯤 되면 별 수 없다. 그냥 해야지.


별거 없는 일용직이지만 그래도 통장에 찍힐 돈이 꽤 된다. 31년 내내 살면서 단 한번도 통장에 찍힌 잔고가 200만원을 넘겨본 적이 없는데, 이번 일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그 이상의 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난 내가 욕망이 없고 욕심이 없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갚을 돈, 바꾸고 싶은 물건,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누구 50만원. 누구 10만원. 컴퓨터. 핸드폰. 식기세척기. 건조기. 글쓰기. 춤추기. 춤 배우기. 무용이 무용(無用)한 세상에,나이는 늦을 대로 늦었고 몸도 누구보다 굳었지만 그래도 한 번은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나를 알아차렸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에서 찬실은 직장도 없고 연애도 없다. 그래도 깊이깊이 생각한다. 깊이깊이 생각하고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걸 한다. 나는 깊이깊이 생각할 전두엽은 없는 것 같지만, 깊ㅇ 정도는 생각해봤다. 아직 쓰고싶고 추고 싶고 ,그 일들을 애증이래도 지긋지긋해도 이뻐 죽겠어도 그냥 살아가고 사랑하고 싶다.


연산이는 복도 많지.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신경 안 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