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연산 Dec 20. 2023

간단하고 단순한

  일하느라 좀 바빴다. 핸드폰을 쓸 수 없는 데다 여러 모로 뭔가를 적고 그리는 데에 제약이 있는 일인지라 적힌 문장 대신 혼잣말만 늘었다. 일 사이에 다녀온 병원에서는 성인 ADHD라는 얘길 들었다. 


통장 잔고는 좀 늘었다. 사회성이 좋아지는 동시에 떨어졌다. 싫은 사람에게는 노골적일 만큼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별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 하듯이 툴툴거렸더니 오히려 평이 좋아졌다. 호감을 숨기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까워지지 못했다. 일은 단순하고 쉬는 시간은 길었고 사람은 너무 많아서 기가 빨렸다. TV를 보다 보다 볼 게 없어서 어촌 다큐멘터리까지 챙겨봤다. 살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비해 3킬로 정도가 쪘다.


단순 업무를 하다 보면 점점 둔해지는 느낌이 든다. 싫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그동안 채워놓은 사회생활 완충제 뽁뽁이가 하나씩 터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대놓고 싫다는 말을 하거나 사람을 피해 버린 일도 잦았다. 또? 사소한 일을 깜빡깜빡한다. 돌아서면 그냥 잊어버린다. 뭘 하려 했는지. '뭘 하려 했는지' 조차 지워버린다. 한 달 반 정도 고민하면서 내가 ADHD라는 걸 받아들이고 치료를 시작해야하나, 하는 도중 내가 받아들인 건 ADHD의 증상밖에 없다. 집중력 부족. 깜빡깜빡. 물건 잘 잃어버리기. 하려던 일 잊어버리기. 그나마 일해보려 노력하던 전두엽이 스스로의 기능 고장을 알고 '노력이 뭔 대수야 애초부터 고장났다는데' 라며 파업을 선언해버린것같다. 


일이 끝나고 하루만에 40만원을 썼다. 빌린 돈 좀 갚고, 연체된 핸드폰 요금 내고, 꾸준히 챙겨먹어야 하는 약 좀 사고, 번 돈으로 아는 동생 저녁을 좀 거하게 사고 집에 돌아오는 고속버스비를 결제하니 42만원인가 그랬다. 눈도 이것보단 천천히 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을 하려던 목적 자체가 흐리흐리해지는 나를 알아챘다. 분명 춤을 추는 나를 지탱하고 지지하기 위한 돈을 모으려던 것 같은데.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싶다가도 이렇게는 왜 안돼, 싶었다. 일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몸을 풀거나 춤을 춘 시간보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을 질투하기 바빴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친해진 사람들은 두 배로 싫어했다. 정신은 정돈 안 된 꽃밭이고, 머릿속 칠판은 오만 낙서로 이미 가득 차 있으니. 그나마 그 낙서를 정제해 출력하던 글조차 없으니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일은 간단해서 좋다. 문제는 간단해서 단순하게 살자, 라는 모토가 뭔가 변질되었다는 거다.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바라던 삶인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걱정이 들어도 우직하게, 불안해도 힘 내서 몸 풀고 춤 추고 글 적는 걸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걸 딴엔 '단순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고 싶었지, 이렇게 나사가 여기저기 빠져버린 느낌이 드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일을 하며 동료들에게 종종 '아는게 힘'이 나은지, '모르는 게 약'이 나은지를 물었다. 100이면 100 '아는 게 힘'을 택했다. 나만 홀로 '모르는 게 약'을 택했다. 내가 ADHD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아직도 뚝딱거리면서 뭐라도 해보려 시도하고 노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생 내내 있었던 고장인데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새로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미칠 노릇이다. 그동안 누수 있던 파이프를 찾았는데 고치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은 정비공은 누수에 다 젖어 맛이 가고 있다. 


춤을 추지 않는 무용수는 무엇인가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무엇인가


간단한 일을 했다. 단순해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믿고싶은것 하고싶은것 보고싶은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