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
연구실에서 인턴을 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짧은 시간에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원하던 랩실에 합격을 하며 바라던 연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꿈을 계속 쫓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학부과정을 마치지 못했던 나는 대학이 있는 인천과 대학원이 있는 대전을 한 학기 동안 오가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나 싶지만, 그때는 연구실 사람들이 좋아서, 연구 분야가 좋아서, 존경하는 교수님 덕분에 힘든 마음보다는 당찬 마음가짐을 갖고 버스에 올랐다.
힘든 시간만큼이나 얻은 것들도 많다. 대학원 합격 발표가 가장 이른 KAIST 같은 경우에는 9월에 합격 발표가 난다. 지도교수 선정 등 의례상 절차를 거치면, 대학원 입학이 확정된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9월부터 12월까지는 마지막 방학이라고 불린다. 이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마음껏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을 담금질로 활용했다. 직접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많은 것들을 습득했다. 인턴이라는 애매한 포지션은 석사 과정분들에게 거리낌 없이 질문할 수 있는 좋은 위치였고 석사 과정분들도 친절하게 질문을 받아주셨다. 그렇게 학습에 가장 중요한 전초전에서 학습 근육도 많이 키울 수 있었다. 쉬지 못해 아쉽기보다는 그 시간을 기초체력을 기르는데 활용할 수 있어 기뻤다.
인턴 6개월 하고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조금 조심스럽다. 연구는 논문으로 말하는데 논문은 시작도 안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구보다는 연구에 필요한 스킬 셋이나 프로그래밍 언어 그리고 프로젝트 참여가 주를 이뤘다. 이렇게 연구실이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 중 일부만을 맛보았을 뿐이지만, 나는 스스로 많이 성장했음을 느낀다. 기술적으로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나 많은 것들을 배웠다.
우선 컴퓨터 활용능력이다. 필자의 전공인 기계공학은 컴퓨터 과학(Computer Science)과 친한 전공은 아니다. 본인도 학부 과정 중에 임베디드를 위한 C언어와 머신러닝을 위한 Python 과목, 여러 전공 프로젝트에서 필요한 Matlab 등 프로그램 언어들을 배웠지만, 어디 가서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C언어 수업을 들을 때에는 곧잘 했지만, 이미 까먹은 지 오래고 머신러닝은 책에 나오는 예제들을 실습해본 게 전부였다. 그나마 제일 잘한다는 Matlab은 컴퓨터 언어 축에도 못 끼는 계산기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지원했던 지금의 연구실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기계공학 연구실이다. 기계공학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가장 딥하게 다루는 연구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다 보니, GPU 서버 환경도 좋은 편이고 석박사 인력들의 코딩 능력도 뛰어난 편이다. 이런 환경에서 적응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지지부진하던 코딩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 잘 정리된 데이터를 가지고 정형화된 모델 구조를 가지고 공부했던 이전과 달리,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여러 방식으로 접근해 문제를 해결하는 산학프로젝트가 실력이 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여러 책을 뒤져보며 공부했고 석사과정 분들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많이 헤맸지만, 조금씩 배경지식이 쌓여가면서 문제 해결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고 이는 학습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 몫을 해내는 연구실 인원이 되었고 조그마한 성취 레코드를 쌓아가며 연구와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으로는 진로다. 브런치에도 누누이 밝혀왔지만, 나는 창업을 희망한다. 주변에 창업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되묻는 질문이 있다. 바로 ‘아이템’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템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로 맞받아치며 대화를 끝내곤 했다. 사실 피벗팅이 당연한 요즘 스타트업 시장에서 아이템은 주요 피벗 대상이다. 좋은 인력만 있다면, 시장이나 아이템은 쉽게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핑계고 눈에 띄는 아이템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난 창의적인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아 이미 대기업이 참여한 시장이라 못하게 됐어.’라고 말을 흐리곤 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같은 아이템을 가지고 경쟁하는 건 미친 짓이다.)
본 연구실은 유독 산학프로젝트 연구를 많이 수행하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을 접목시킨 연구라는 점에서 당연한 측면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본 연구가 시장에서 ‘먹힐만한’ 연구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실제로 제품과 관련한 여러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기술력 외에도 시장성이나 시장 등을 같이 살펴보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기술 시장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아직 게슴츠레 뜨긴 했다만;) 기존에는 그냥 회사 측에서 설명해주는 기술의 특징만을 살폈다면, 이제는 그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구조를 사용했는지, 방법론을 적용했는지 의문 혹은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중에 활용한 개념들을 가지고 현재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직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실현 가능성이 높은 아이디어도 아니지만, 이런 백그라운드가 없다면 낼 수 없는 아이디어들이다.
이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누구나 달로 가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고 그 대부분은 모두 비슷한 (0에 수렴하는) 성공 확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 일을 해낸다. 성공한 이들이 뛰어나서도 맞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경험으로 배운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얼토당토않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밤새가며 토론해봐야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적어도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성공과 실패를 구분 짓는 것은 지식도, 실력도, 우연도 아니다. 경험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여러 경험 레코드를 축적하고 있다.
한 개인이 홀로 무언가를 해내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한 개인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들이 홀로 그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If I have seen further than others, it is by standing upon the shoulders of giants. Isaac New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