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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Jun 25. 2022

나와는 다른 사람

조수미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지만, 생각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내가 아무리 어떤 그룹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사람은 또 다른 그룹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전과는 다르지만 결국은 변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곁에 있고는 한다. 인간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회는 더더욱 흔치 않다.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홀연히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일상을 벗어나야 한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서 일탈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그조차도 부족하다. 새로운 자극을 만나더라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너무나도 다르면 그것을 공감하기보다는 배척하기 일쑤다. 여의도 금융맨과 양양 서퍼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가치관 혹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 자극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것도 캠퍼스에서.     


 5월 13일, 한국과학기술원의 초빙교수가 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교수님의 강연이 있었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는 조수미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나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신청했다.

 강연 당일, 그녀의 명성을 보여주듯 대전 시민들, 카이스트 학생들, 그리고 이광형 총장님까지 많은 분이 강당에 모였다. 조수미 님은 자신의 학창 시절부터 처절했던 유학 시절, 그리고 최고의 소프라노가 되기까지 일대기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어쩌면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냈다. 

 강연 속 그녀는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악을 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조수미 교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성악가를 꿈꾸셨지만, 현실에 막혀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꿈을 자기 딸에게 투영시켰다.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딸에게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성악 교육했고 그 훈련 방식은 냉정했다.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 딸을 방에 가둬 훈련을 계속 시켰으며, 조수미 씨는 그런 훈련 방식을 오랫동안 참고 견뎌냈다. 다행히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그 혹독한 시간을 이겨내 서울대 성악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이후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동양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 최정상 소프라노로 성장하게 되었다.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법한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하나도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삶에 선택지는 성악 하나였다. 조수미 님이 성악가의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녀 또한 그 삶을 만족한다는데 있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과는 별개로, 하나의 선택지만을 가지고 한 번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않다. 이 시대의 리더라고 볼 수 있는 마크 저커버그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도 하버드 대학을 중퇴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휴학 상태에서 창업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었다. 휴학은 만약을 대비한 선택이었다. 나 또한, 한 가지 선택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나은 선택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여러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편이다. 특히 인생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진로는 창업, 취업, 진학 등을 모두 염두에 두고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방식이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최적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조수미 님이 그랬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똑같은 성공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재능을 가진 분야를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고 거기에 성공하기까지 하는 것은 사실 많은 가정이 깔려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삶은 나와는 참 매우 다르지만, 달라서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녀의 삶과 성공은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가치관을 명쾌하게 거스르는 반례다. 내가 나의 가치관을 주제로 강연을 열고 같은 시간에 조수미 님도 강연을 연다면, 이목을 끄는 건 아무래도 조수미 님의 강연일 것이다. 그녀는 그 가치관을 통해 성공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가치관은 승자독식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가치관을 버릴 필요도 없다. 그저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될 뿐이다.

 나는 그 강연을 듣고도 내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강연이 의미가 있는 것은 나와는 다른 사람도 또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골 기질로 상대의 말을 무작정 믿지 않는 나지만, 내가 어찌 조수미 님의 가치관을 반론하겠는가.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사실을 이 강연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흐릿하지만 작은 틈새가 내 시야를 넓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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