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 깼다.
그 시간에는 빛 투과율이 거의 100%에 가까운 암막 커튼 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거실 쪽이 어슴프레 보였다. 뭔가 흐릿한 형체에 더럭 겁이 났다.
뭐지? 가위에 눌리려나? 그러나 잠이 깬 것만은 확실했다. 몸을 뒤척여 보니 잘 움직였다. 조금 안심이 되어 다른 가설을 세웠다.
'커튼을 안 닫고 잤나?'
그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어나서 커튼이 열린 것을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잠을 청할 것인가. 일단은 더 자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계속 신경이 쓰여서 4시가 다 되도록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고도 20분을 더 꼼지락 대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저 놈의 커튼 닫아 준다, 닫아줘.'
새벽이 다가올수록 더 밝아지는 통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아내와 반려견 카이, 망고를 피해 안방을 나섰다. 역시 커튼은 열려 있었다. 그제야 문득 잠들기 직전 베란다에 있는 쓰레기통에 뭔가 버리고 그냥 들어오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날 괴롭히는 건 언제나 내가 저지른 일이지. 쓰읍.'
혼자 조용히 툴툴거리고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왠지 안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아내와 강아지들의 잠을 깨울 것 같다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뒤척이던 내가 커튼을 닫았다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용히 작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컴퓨터가 있는 일명 작업방, 혹은 서재다. 책상 앞에 의자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앉아 잠이 들지 못한 과정을 생각했다. 나는 거실이 보이는 게 왜 그렇게 신경 쓰였을까?
생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본적인 원인이 커튼은 아닐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원인으로 생각해 볼만한 이유들을 떠올렸다. 먼저 떠올린 것은 최근 시작한 운동이다. 몸이 찌뿌둥한 것을 느끼고 있어서 자면서도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운동이 잠을 잘 오게 하면 했지 3시에 멀뚱 거리게 할 것 같진 않았다.
두 번째 떠올린 것은 외주형식으로 쓰고 있는 소설과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라 공모전용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되는 것 같았다. 공모전용 소설을 쓰면서 너무나 잔혹한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내 모습이 소름 끼친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악몽수집가'라는 소설을 기획하면서 말 그대로 끔찍한 악몽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수집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실제로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그만 둔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잠들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이유 같진 않았다. 어느 정도 영향이 있는 정도이지 전적으로 그 이유라고 볼 순 없었다.
세 번째로 떠올린 것은 윤도현밴드였다.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어제(4일) 경희대 수원캠퍼스에서 있었던 콘서트에 갔었다. 콘서트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가수를 꿈꾼 적도 있었을 만큼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었고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외를 새벽까지 하던 때부터인가? 아님 술에 만취한 채 노래방에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노래한 후던가? 아님 그냥 나이가 들어서 노래를 잘 부르지 않기 시작했을 때였나?
고음이 안 나왔다. 가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름 롹커였는데... 목이 완전히 가버린 것이다. 두성으로 커버도 안 된다.
하지만 새삼 그것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50대가 넘은 윤도현이 그렇게나 신나게 노래하고 무대를 방방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저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나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싱숭생숭 하기는 했었다.
결국 이유는 퇴사였다. 아주 잠깐, 잠든 아내와 강아지들을 지나오면서
'만약 아내가 아프면
내가 혼자 우리 가족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지금은 아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글을 쓴다는 명목으로 회사를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데, 과연 아내가 갑자기 건강이라도 좋지 않아 지면 지금 퇴사한 걸 후회하지 않을까? 아내가 있으니 남들보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퇴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던 것이 기억났다.
퇴사를 결심할 때만 해도 한 달이면 뭐라도 절반은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작에서 멈췄다. 이런저런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있지만 나 자신에게 떳떳할 만큼 열심히 했다고는 말 못 한다.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자 가장 올바른 방법은 쓰고 있는 글을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란 생각이 무의식을 건드린 것 같다.
"네가 그러고도 잠이 오냐?"
라는 마음의 소리가 귓전에 울렸던 거다.
어영부영 1월이 지나고 2월이 왔다. 이제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힘을 써야 할 때다.
누군가는 부담 없이 쓸 때 글이 잘 써진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개소리다. 나는 부담감이 없으면 그냥 하루종일 자거나 게임을 하거나 TV, 유튜브를 본다.
부담 갖자. 빨리 쓰자. 쉴 만큼 쉬었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