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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돼지 Jan 29. 2020

해외 살이 4년 차에 온 고비

그토록 원했던 해외취업이었음에도

대학생 시절 1년 간 했던 영국 살이가 너무 좋아서 진로를 바꾸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거쳐 영국에서 취업을 했다. 그토록 원하던 해외취업이었음에도 영국에 온 지 3년이 넘으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

작년 연말에 남자 친구와 한국에 다녀왔다. 일주일 정도 되는 짧은 기간을 쪼게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남자 친구를 위해 관광을 했다. 서울에 태어나서 영국에 오기 전까지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처음으로 경복궁에 가봤다.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죽기 전에 경복궁에 안 가보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서울을 좋아하는 남자 친구를 보니 뿌듯함이 들다가도 내 나름대로도 혼자 왔으면 관광할 시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들었다. 남자 친구도 나름 숙소에서 혼자 지내며, 서운함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작년 여름, 취업 비자 때문에 한국에서 몇 달 동안 의도치 않게 강제 백수가 되었다. 친구들과 강원도 계곡에서 리프팅을 하고, 술집에서 수다를 떨며 맥주를 마시고, 친언니 집에서 1박을 하고 족발과 간장게장을 얻어먹고, 엄마와 집 앞 공원을 걷고,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 언제 그렇게 도란도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어 그 시간이 참 그립다. 지금은 내가 원해서 타국에 있는다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앞으로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슬프다.

가족들이 남자 친구를 참 좋아했다. 다 같이 외식을 하고, 엄마는 집에서 밥을 차려주고, 숙소에 혼자 있는 남자 친구의 점심을 싸주고 간식과 과일을 챙겨주었다. 춥다고 기모 청바지를 사주고, 친언니는 한국에서 유행 중인 양털 재킷을 나와 남자 친구에게 사주었고, 남동생은 백화점에서 한과와 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맛 아몬드를 꽤 많이 사주었다. 친구들도 멀리서 온 남자 친구를 위해 작은 선물들을 주었다. 나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것을 받았지만, 남자 친구가 내 남자 친구라는 이유로 환영해주고 신경 써주는 모습을 보니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영국에서는 내 사람은 내 남자 친구뿐인데 한국에는 이렇게 많은 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더 느껴졌다. 한국에 갔다 오고 나서 몇 주 동안은 계속 한국에 가는 꿈을 꿨다.  

친구가 남자친구 선물로 사진 컵받침


돈 못 버는 기계

한국에서 일을 할 때는 일 외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돈 버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영국에 오니 비싼 주거비 때문에 기계처럼 일은 하는데 돈은 모을 수가 없으니 '돈 못 버는 기계'가 되었다. 런던에서 살려면 셰어하우스에서(방 한 칸을 빌리고, 화장실, 부엌, 거실 같은 공용공간을 함께 쓰는 형식) 월 약 100만 원은 줘야 한다. 지금 남자 친구와 런던 외곽의 방 하나짜리 작은 집을 렌트해서 사는데 수도세, 전기세를 제외하고 세금(Council tax)과 렌트비만 해도 월 150만 원 이상을 낸다. 젊었을 때 1,2년은 해외에서 경험한다고 생각하고, 돈을 못 모으며 사는 것에 크게 마음이 안 쓰였지만, 자리를 잡아가는 한국의 친구들을 보니 뒷처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렌트비만 덜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남자 친구에게 빨리 집을 같이 사자고 이야기해봤지만, 내가 작년에 일이 너무 힘들어 한국에 가버리겠다고 한 후로 남자 친구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상태다. 2년 정도 더 같이 살아보고 같이 집을 구매하자고 한다. 혼자서라도 집을 샀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빠듯한 실정이다.  


근래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차면서 한국에 가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 내가 영국에 살면서 얻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영어 실력 향상

성인이 되어 영국에 왔기 때문에 나의 영어는 한국인 억양이다. 그럼에도 영어로 업무를 하고, 영국인과 이야기를 하는데 무리가 없다. 물론 아직도 뭇 알아들어서 되묻고, 틀린 대답도 한다. 나는 내가 영어 실수를 할 때, 그렇게 창피하지 않다. 현지인들도 많이 못 알아듣는다.


한 번은 스타벅스에 남자 친구와 함께 갔다. 남자 친구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티에 우유를 넣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직원이 주문을 받고 남자 친구에게 컵에 우유를 넣을 공간을 비워둘지 물었다.

"우유를 넣을 공간을 비워둘까요?(Space for milk?)"

남자 친구는 못 알아듣고 물었다. 스태프가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남자 친구가 또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듣다 못한 내가 또박또박 말해줬다.

"스페이스 포 밀크!"

남자 친구 말로는 영국 사람 아닌 거 같다고 했다. 내가 영국 사람 맞다니까 York(영국 지방) 출신은 영국 사람 아니라고 한다. 영국은 지역마다 사투리가 다양해서 같은 영국 사람끼리도 이해 못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외국인이 못 알아듣고 되묻는 건 더 괜찮다.

20대 초반에 '스킨스', '닥터 후'와 같은 영국 드라마를 보면서 언젠가 자막 없이 영어 원작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지금 이루었다. 아직도 영어자막을 켜놓고 보고, 100%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영국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즐기면서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설사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영어로 밥벌이는 해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정신 건강

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국에 살면서 화가 잘 나질 않는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택배가 늦으면 쇼핑몰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따지고, 식당이나 통신사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클레임을 했다.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배송이 느리기 때문에 늦어도 화가 나질 않는다. 오기만 하면 다행이다. 기차가 지연되면 투털 투덜거리는 사람은 있어도 크게 화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출근 시간에 한 시간에 두대 다니는 기차가 취소되어도 사람들이 참 침착하다. 남자 친구와 작년 여름 콘월이라는 영국 지방에 놀라갔을 때는 기차가 늦으면 화가 나기보다 철도회사에 부분 환불 신청을 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슬프지만 그렇게 된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면 화가 났다. 영국에서 직장 생활도 상대적으로 화날 일이 적은 편이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스트레스성 질환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던데, 나는 상대적으로 그런 질환은 없는 편이다.


영국이 한국보다 위생적이지 않다든가, 서비스가 느리다든가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조금 살다 보면 적응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경우는 흔히 한국인으로서 겪는 불편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느릿느릿하고 대충 살고 싶어 하는 성향은 영국과 참 맞는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산지 3년이 넘어가니 한국이 너무 그립다. 남자 친구를 안 만났다면 지금 비자가 끝나고는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 같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그도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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