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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돼지 Mar 12. 2020

이틀 간의 이별

잘하라고만 하지 말고 나나 잘하자.

서른이 지나고 나니 이 나이 대 사람이 변하는 것이 쉽지 않다. 10대에 타인과의 호환성이 100%라면 20대 초반에는 80%로 줄고, 졸업, 취업, 직장 생활을 견뎌 30대에 접어드니 20%의 호환성만 가지게 된다. 지금 나의 80%는 그 성질이 이미 형성되어 남은 20%만으로 크게 변화하기가 어렵다. 오랜지기 친구들과도 가끔 부딪히는 일이 생기고, 주변의 연애만 봐도 그렇다. 30대끼리의 연애는 더 이상 서로에게 맞춰주는 연애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사람 간에 얼마나 잘 맞는가를 테스트하는 실전이 되어버렸다.


나에게만 완벽한 연애

과거의 연애 경험 때문에 무조건 잘해주고 위해주는 연애보다는 계산적인 연애를 하게 되었다. 남자를 선택할 때도, 이끌림과 사랑 자체의 감정보다는 그 사람의 직업, 가정환경, 성격 등의 요소를 계산기에 넣어 두드린 후 일정 값이 나온 후에야 연애를 시작했다. 지금 남자 친구와 연애를 하면서도 어리고 착한 남자 친구가 항상 만만했다. 내가 하는 사랑 표현보다 그가 해주는 사랑 표현이 더 컸고, 그가 회사를 쉬는 날에는 나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다. 내가 야근하는 날에도 나를 데리러 왔다. 집안일을 미루는 나를 대신 해 남자 친구는 집안일을 선뜻해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아졌고, 남자 친구는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나를 위해주었다.


갑작스러운 이별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 친구가 쌓인 것들이 많았을 것이 당연한데 당시의 나는 자만하고 이기적이었다. 어느 날, 남자 친구는 우리 관계에 확신이 없다는 말을 털어놓았고, 나는 한마디 불평 없던 남자 친구의 입 밖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관계는 완벽한 것 아니었나.

나는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에 남자 친구를 도발하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의 연애의 대부분은 상대방이 이끌어서, 상대방이 붙잡아서 한 연애였다. 남자 친구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설득해서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남자 친구도 원래 자기가 계획한 이야기의 방향은 이렇지 않았다고 했으나 어쨌든 우리는 그날 그렇게 헤어졌다. 남자 친구는 그날 밤 바로 부모님 댁으로 갔다.


다음 날, 출근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떤 예고라도 있었으면 덜 황당했을 건데 나로서는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전날 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도 일을 하며 이성의 끈을 잡고, 이성적으로 어제의 일을 회상할 수 있었다. 어제는 남자 친구가 그렇게 미웠지만, 그 이전의 상황들을 보면 사실 남자 친구보다 내 잘못이 더 많았다. 남자 친구가 그전부터 속마음을 이야기했는데 내가 듣지 않고 무시했다. 나를 많이 사랑하니까 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제는 나도 좀 더 이성적으로 남자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다. 생각 정리가 되자 남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 남자 친구들은 나와 사귈 때는 나에게 잘해주지 않다가 헤어지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붙잡았다. 나는 그때마다 '있을 때 잘했어야지.'라고 혀를 찼다. 이번엔 내가 그 반대 입장이었다. 있을 때 잘했어야지!


남자 친구와는 동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단번에 모든 걸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메시지로 차차 정리할 것들을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오늘 밤이라도 혹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물어봤고, 남자 친구는 다른 스케줄이 있으니 내일모레, 토요일 아침에 보자고 했다. 그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나는 남자 친구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재회

그렇게 토요일 아침 일찍 만나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미성숙했고, 내 잘못이라고 사과했고, 남자 친구는 왠지 또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는 어제 짐을 챙기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집에 와서 현관문 앞에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고, 다시 나와 만나야겠단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남자 친구는 나에게 이런저런 사과를 하고, 자기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그렇겠다고 했다. 나의 대답과 동시에 남자 친구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다소 드라마틱했지만 남자 친구가 아직 어리고 여리다는 걸 느꼈다.


타이밍이 참 야속하게도, 나는 그 전날 회사에서 경영악화로 권고사직을 받았다. 취업비자로 영국에 머물고 있는 나로서는 일을 못 구하면 영국을 떠나야 하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다시 사귀기로 하고, 나는 내가 권고사직을 당했다고 말했다. 작년 만우절 날, 남자 친구에 같은 거짓말을 했었는데 실제로 벌어질 줄이야....... 나는 속상한 마음에 울음이 터졌고, 남자 친구는 위로해주었다. 나중에 남자 친구는 내가 권고사직당한 것을 재회한 후 말해준 것이 사려 깊었다면서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게 왜 고마운 건지 묻자, 그 사실로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거였는데 그렇게 안 했다나. 헤어질 사이면 당연히 내가 잘린 사실도 상관이 없으니 먼저 말을 안 했을 뿐인데 이게 사려 깊은 게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재회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나는 이제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한 사람이 요리를 하면 다른 사람이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룰이 있지만, 가끔은 내가 요리도 설거지도 하기도 한다. 백수가 되면서 남자 친구만 일을 나가니 가끔 남자 친구의 빨래를 해서 널어놓기도 한다. 내가 계산을 멈추자 신기하게도 관계가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 남자 친구는 여전히 나에게 많을 것을 해준다. 남자 친구는 이제 나에게 더 고마워한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 모든 것이 계산되어 딱딱 떨어질 수 없다. 머리로 하는 연애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연애가 되니 더 안정된 연애가 되었다. 계산기를 내려놓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으나 참으로 잘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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