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항공사에서 외항사로 준비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길의 가장 큰 걸림돌인 영어와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 vs 영어
둘 중에 하나는 이겨야 이 멀고도 험한 승무원의 길이 끝나는 것이었다. 영어가 이기면 난 승무원을 포기하는 것이고 내가 이기면 나는 결국 승무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승무원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때 당시의 내 머릿속에는 오직 영어만 할 수 있으면 외항사 승무원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자만심이었다)
한 번쯤 승무원 준비를 해보았을 사람들은 알 것인데 승무원 준비하는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특히 외항사 승무원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 공채가 잘 뜨지 않으면 해외로 직접 가서 오픈데이를 보곤 한다. 물론 나는 그런 적은 없었다. 에어아라비아에서 카타르로 이직할 때쯤은 내가 중동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쨌든 이 대단하고 힘든 여정이 시작된 이상, 나에겐 빠듯한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다 큰 성인이 승무원 되겠다고 부모님께 손 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죽 공장에서 해외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 20분까지 출근, 오후 6시 30분에 퇴근이었고 토요일은 격주로 근무였다. 월급은 단돈 140만 원.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서글픈 직장인의 인생이었다.
중소기업의 비애, 말로만 해외영업사원이지 나는 말단 사원이라는 이유로 온갖 허드레 일을 다 하였다. 사무실 청소부터 손님 커피 타 오기, 담당 바이어들과의 연락, 계약 물건 관리, 오더 관리, 용달 부르기, 짐 싣기, 수출 용품 신고하기. 하루에도 몇 번을 Factory floor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특히 여름이면 난 땀으로 샤워를 했고 슬리퍼를 신고 다녔던 내 양발은 시커멓게 변하기 일수였다. 한 날은 엄마가 빨래는 해주는데 내 시커면 양말과 쉰내 나는 청바지를 빨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최저 임금을 받고 최대치의 노동력을 써오던 때에 나는 영어공부까지 해야 했었다. 그때 당시 스카이프로 필리핀 선생님과 화상통화로 영어수업을 하였는데 선생님과 학생 이상으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선생님 그 이후로 나에게 수업료를 낮춰주고 매일 한 시간씩 수업을 시켜주었다. 너무나도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주말에는 외항사 준비를 하러 두 번째로 등록했던 승무원 학원을 다녔다. 우리 집과 꽤 먼 거리에 있는 학원이고 주말반이라서 늦잠은 감히 허락되지도 않았으며 거의 종일 학원에 있었다. 이 학원은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학원을 다니면서 친해진 친구들이랑 에어아라비아에 같이 합격하여 BFF가 되었다.
영어면접 연습, 메이컵 실습, 워킹, 영어면접 실전 연습까지, 나름 잘 짜인 커리큘럼이었다. 선생님들도 다들 꽤 승무원으로 경력이 많으신 분들이었다. 지금은 부산지점은 접었다고 알고 있다. 영어면접 연습하는데 서로 피드백도 해주었는데 이런 부분에서 나는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내 비루한 영어실력을 보여준다는 게 정말 창피하였지만.
면접 질문이 정해져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다. 영어만 잘하면 면접을 가뿐하게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은 아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자신감 뿜뿜으로 면접만 보러 가면 실패하는 것 같다. 그중에 말을 정말 잘하고 나와 티키타카가 잘 맞는 면접관을 만나게 될 경우에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면접 준비는 자신감을 장착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내가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면접장에 나가면 그 어떠한 질문을 받든 간에 내가 준비한 문장으로 연결하여 대답을 하면 나는 조리 있게 막히지 않고 나에 대해서 잘 어필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건 내가 썼었던 방법이었기 때문에 면접 준비는 제대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는 날 없이 일하고 공부하면서 벌었던 최저 임금, 이 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더 열심히 면접을 준비했었다. 어쩌면 이런 빠듯한 스케줄로 살았던 덕분에 내 꿈이 조금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