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노래를 했으면 행복했을까
굉장히 좋아하던 작품이 드라마화되었다. 뛰어난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주어진 환경을 이겨내는 영웅 서사, 그리고 주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출연진과 이야기 속의 여성연대를 다루는 작품. 웹툰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나는 드라마화되는 작품은 잘 보지 않는데 이 작품은 티빙 결제를 해서라도 봐야겠다.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들의 등장, 이어지는 명창에 심장이 멎을 것도 같은 게 아주 잠깐. 아, 그러지 말 걸.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말았다. 아주 씨라-식(Classic)한 목소리를 가졌다는 극찬과 함께 가수로 캐스팅당했었다는 그때 그 당시의 그녀를 작품에서 마주쳐버렸다. 자신의 꿈을 향해 꿋꿋하게 나아가는 정년이의 그림자 뒤로 돈을 버는 길을 선택한 할머니의 그림자가 겹쳐 보이는 듯하다.
이토록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애착 목사를 갈아치운지 벌써 몇 번째, 우리에게는 해 주지도 않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양복을 바친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새로운 교회를 찾아 나선다. 목사와 싸울 일이 없으면 사모와 싸웠고, 권사와 싸웠고, 장로와 싸웠다. 모두와 사이가 좋으면 일반 교인과 싸웠다. 이 집단이 끝나면 저 집단에 가서 싸웠다.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으면 가족과 싸웠다. 자신의 친자매들, 조카딸들, 건너 건너 알게 된 사람들, 시골에 새로 온 이웃 사람들.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잘해줬고 그 모두와 싸워서 관계를 단절했다. 더 이상 씨라식한 목소리는 없지만 세월을 통해 얻은 바이브레이션이 탑재된 성대가 있다.
그중 가장 만만한 것은 당연히 우리였다. 그 모든 싸움에서 그녀는 늘 피해자였다. 마음을 몰라주는 것은 늘 상대방이었다. 우리와 싸우지 않을 때 우리의 역할은 그 모든 싸움에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그녀의 관계를 이어 주기 위해, 혹은 개선해 주기 위해, 또 더러는 대신 싸워주기 위해 온 가족이 참 많이도 불려 다녔다.
그녀가 싸우는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은 그녀의 방어기제에 있었다. 그래, 나는 결국 그녀의 상황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높은 자존심과 다양한 재능, 얼마나 펼치고 살고 싶었을까. 혼자 마당에 닭장을 짓지 않나 아궁이를 만들거나 하더니, 급기야는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단다. 어느 날은 집 안의 온갖 이 빠진 도자기에 굴러다니는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려 화분으로 만들어 두었다. 내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으면 두고 가라고 했고, 작은 아씨들을 나눠 읽은 날에는 서로 어떤 캐릭터가 마음으로 이해되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보며 늘 50년만 늦게 태어나지, 참 재밌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속으로 되뇌지만 직접 전할 수는 없는 아쉬움에 발 끝만 바라본다. 그녀와 화해하고 그녀를 꼬셔 훌라를 추러 다니는 상상을 잠깐 해본다. 아뿔싸, 다소 눈앞이 아찔해져 그만두기를 몇 번. 아무리 생각해도 취미가 비슷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녀의 삶이 조금 더 알차고 행복할 듯하다. 알던 모습 중 가장 얌전한 할머니의 버전으로 다시 시도해 본다. "째는 저렇게 뚱뚱한데 옷을 저렇게 입니? 째는 치면 톡 뿌러지겠다. 니는 처녀가 뱃살이 이렇게 나와서 결혼이나 하겠니?" 그녀의 씨라식하고도 큰 소리가 귀에 윙- 들리는 듯하다. 접자, 접어. 누가 누굴 데리고 온단 말이냐.
소시오패스의 분류인 나르시시스트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주어진 성장 환경에 따라 발현하는 양상은 분명 다르기 마련이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6.25를 온몸으로 겪었다. 늘 구체적인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피난민 시절 다친 다리를 당시의 의료 상식과 기술로는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그녀의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다.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지는 그녀만이 알 것이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운 여성이 쌈닭이 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훌라당에 주 2회 꼬박꼬박 출근하듯 참석하게 된 것이 벌써 수개월 째. 연달아 수업을 듣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쉽사리 그 방법을 선택하진 못한다. 그저 매주 일요일과 화요일 꼬박꼬박 두 번씩 관악구에서 마포구로 이동한다. 때때로 합정에서 신림까지 따릉이를 타고 돌아오는 날에는, 더더욱 때때로 신림에서 합정까지 따릉이를 타고 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그 어느 누구보다 뿌듯한 하루를 산 기분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운동 광인이라 운동 일자를 늘리려고 그래요~ 하는 멋진 이유면 조금 좋겠지만, 사실 나는 사랑 광인에 가깝다. 나는 보고 싶은 두 집단을 전부 포기하지 못해 주에 2번이나 왕복 2시간이 넘는 길을 떠나는 것이다.
심리 상담을 진행할 때, 가장 인상 깊지만 해소되지 않았던 선생님의 질문 중 하나는 "00님이 생각하는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요."였다. 인간관계가 무엇이냐니. 이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가. 수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건대 그때의 나는 인간관계에 역할과 롤을 부여하는 부모님에 대해 극심하게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내가 어떤 관계 속에서 특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제 버릇 남 못줬지만, 적어도 인지 정도는 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큰 발전인가.
이 공간 내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아래에 우리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감출 수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 나이도, 직업도, 어쩌면 성별도 가려진 보장된 익명성 아래에서 어떠한 솔직함은 더욱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달달 떨며 한 주 동안 있었던 일을 리스트업해와서 나누기도 하고, 누군가는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이번 멘트는 패스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어느 누구는 자신이 지난주에 읽은 책 구절 중 나누고 싶었던 문장을 꼬옥 적어와서 읽어주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기도 한다. 다소 분위기가 사이비 종교 같다고 느끼며 경계하던 첫 달의 나는, 이렇게 조금 알아버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진득한 고민 끝에 다음 달 수강료를 입금하고 만다.
동그랗게 마주 보고 앉아 어느덧 내가 사랑하게 된 이 사람들, 그래서 다른 반 수업 들으러 떠나지도 못하게 된 이 여성들의 한 주간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는다. 지난주에 너무 힘들었던 누구는 이번 주에 일이 해결이 되었다며 해사하게 웃는다. 지난주까지 같이 웃으며 술 마신 누구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보인다. 세상의 모든 직업군을 모아놨다고 해도 거짓부렁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한 데 모여 대화할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전혀 몰랐을 분야의 사람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내 세상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기본 정보가 아무것도 없고, 인당 1분 남짓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만으로도 나는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어떠한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상대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이 시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해당 글은 브런치북 "손녀딸은 요즘 훌라 춰요"의 글과 함께 보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