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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Nov 20. 2024

할머니의 유산 -1-

MBTI의 축복

“그래서 내 mbti가 뭐라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핸드폰을 가만 내려다보며 유명인 mbti 리스트를 확인하던 아빠는 또 나를 돌아보며 벌써 다섯 번째 같은 질문을 하는 중이다.

“INTP, 엄마는 ISFJ~”

그 뒤에 따라 나올게 뻔한 질문에 미리 대답하며 나는 각각의 알파벳이 서로 어떤 알파벳과 대응되는지, 왜 둘이 그 mbti 결과가 나오는지 줄줄 읊는다.

“S 반대가 J라고???”

“나는 그럼 감정이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명씩 질문해~~~~“


똑같은 설명을 벌써 몇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즐거운 대화 주제라 생각하는 그들의 첫째 딸은 ENFP 되시겠다. MBTI 과몰입에 대한 우려의 시선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심리 분석을 기반으로 한 인간 유형 분류의 보편화는 감사할 따름이다. MBTI의 등장으로 적어도 우리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 나는 할머니를 아주 많이 닮았다. 아주 간단하게 계산했을 때, 내가 가진 유전자 중 1/4만이 할머니로부터 왔다. 엄마, 아빠로부터 반씩 받았으며 엄마와 아빠도 각자 자신의 부모님으로부터 반씩 받았을 테니까. 그러면 대충 1/4 정도씩 골고루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모도, 기질도 엄마보다는 아빠를 조금 더 닮은 나. 본인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기질적으로 더 닮아버린 나의 아빠. 사실 이것은 내가 가진 x 염색체 두 개 중 하나는 친할머니로부터 받았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큰 딸은 아빠를 더 닮고, 아들은 엄마를 더 닮는다는 이야기를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성염색체라고 부르는 x염색체와 y염색체 중 x 염색체에는 성별을 결정짓는 유전자보다는 면역기능, 인지기능, 근육 발달 및 성장 등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정보를 포함하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y 염색체는 x염색체보다 크기가 작아 유전자 종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이마저도 성별을 결정짓는데 필요한 유전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들은 성별이 남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x염색체는 어머니로부터 받기 때문에 x염색체가 관여하는 많은 특성을 어머니를 닮기 마련이다. 반면에, 딸은 아버지로부터 x염색체 하나를 받고, 어머니로부터 x염색체 하나를 받는데 실제 체내에서 필요한 x염색체의 양은 하나이기 때문에 x염색체 하나는 비활성화가 된다. 앗, 그러면 이 글을 읽는 여성들은 자신의 x 염색체 중 무엇이 비활성화되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x 염색체 비활성화는 세포마다 무작위로 발생하고 이는 모자이크 현상이라 부른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체내에서 섞여서 발현되기 때문에 아들에 비해 아빠를 조금 더 닮아보일 수 있겠지. 사람의 외형을 결정하고, 성격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수도 없이 많기에 성염색체의 분배가 아들과 딸의 친탁과 외탁 정도를 결정하는 단일요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는 이 경향성이 어느 정도 유효하게 작용했다.


흰쌀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잡곡밥을 좋아한다. 전라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강원도에 살아야 행복한 사람 마냥 감자와 옥수수만을 찾는다. 그리고 똑 닮은 취향의 아빠를 거쳐 경기도가 고향인 나도 마찬가지. 하물며 옷 취향도 똑같다. 단정하지 못한 차림이라고 엄마가 싫어하던 화려한 옷, 할머니 앞에서 뽐내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옷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옷장을 뒤져 어딘가 빈티지하면서 어딘가 더 화려한 과거의 유물을 꺼내 걸쳐보는 그녀. "얘, 내가 입기는 너무 야하지 않니?" "에이~ 할머니, 옷 입는데 나이가 어디 있어~~" 쿵짝이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반짝거리는 장신구는 걸치는 것은 물론이고 그저 모으기만 해도 예쁘다. 늘 모으는 것은 쉽고 버리는 것은 어렵고, 어지르는 것은 쉽고 치우는 것은 더 어려운 것까지. 늘 깔끔한 엄마와는 정반대다. 어릴 적 할머니가 운전하는 차량 조수석에 앉아 집에 가는 길은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그 작은 시골 동네를 골목골목 늘 새로운 길로 뺑뺑 돌아다니며 탐험을 즐기는 할머니의 모습은 좋아하는 동네를 골목골목 두 다리와 자전거를 통해 누비는 내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다. 역시 늘 가본 길을 선호하고 시골길에 차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엄마와는 정반대다. 춤과 음악을 사랑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어려서는 낯을 가려 뒤로 빼기 일쑤였는데 조금 더 크고 나니 무리 내에서 한껏 나대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 살면서 굳이 노래방을 가야 하나? 궁금해하는 엄마와는 역시나, 정반대다. 유전의 힘이란 이토록 놀랍다.




어휴, 저 발 쪼꼬만 거는 지 할머니 쏙 빼닮아서.

엄마는 자기가 결혼하고 애를 낳고 보니 자신은 없고 아빠만 둘 낳은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나는 크면서 엄마를 조금 더 닮아갔지만 우리가 어릴 때는 아빠 모양 거푸집에 넣고 찍은 것 마냥 엄마의 얼굴이 없었다. 동생은 죄다 외탁했는데 얼굴 느낌만큼은 아빠 붕어빵인지라 우리 둘 다 어디 가서 미아가 될 걱정은 안 했다고 했다. 자신이 낳았지만 자신보다 시어머니를 닮은 첫째 딸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세네 살이 하필 유아애착관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도 모르고 당시 사정상 할머니댁에 일 년여 맡겼을 때, 돌아온 딸이 그저 시어머니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어땠을지 가만히 상상해 본다. 


"어우,,, 나는 내 딸이 그러면 너무 싫을 것 같아.. "

살면서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을 겪었을 때 습관처럼 나오는 엄마의 말버릇. 엄마, 엄마 딸이 꼭 그래. 툭 던진 말에 대신 변명을 해주는 나. 엄마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정 가운데에 늘 내가 있다. 나는 어쩌면 나를 해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너무도 다른 기질을 타고난 덕분에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면 애써 사랑 렌즈를 끼고 상대방의 입장을 되물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짝꿍과 연애와 결혼 생활을 할 때는 성인 대 성인으로 바라보았기에 보다 쉬웠을 과정이, 자신이 낳은 딸을 이해하는 데에는 비록 무척이나 그를 닮았을지언정 한 단계 이상의 과정이 더 필요한가 보다고. 자신이 낳았기에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거라고. 그저 그런 것일 거라며 조용히 그녀를 이해할 뿐이다. 


"세상은 전부 매트리스 세계관 같아.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걸까?"

종교의 영향으로 사주, 타로, 신점 등의 모든 것을 미신으로 규정하던 그가 몇 년 전 우연히 사주를 보게 된 후 아빠가 빠진 것은 다름 아닌 운명론이다. 자신이 미리 걱정하고 예측하여 막고 피하려고 애썼던 모든 일이 결국에는 마치 원래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것처럼 흘러간다는 그만의 이론. 말을 잘 듣던 내가 결국 대학 때 방황하고, 나름 자신의 기준대로 잘 키운 줄 알았던 아들의 양육도 성인이 돼서 난관을 겪으며 스스로 적립한 가설이다. 


그는 늘 경계했다. 자신의 단점도, 장점도 죄다 빼다 박은 나를, 때로는 자신보다 자신의 어머니를 더 닮아 보이는 나를. 비슷한 취향일 때, 취미가 겹칠 때, 재능이 같을 때는 조용히 내 취미에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을 표했다. 본인이 가진 재능 중에 엄마로부터 받은 재능은 없는 취급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나를 볼 때도 적용됐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육자의 침묵 혹은 무관심은 나의 재능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했다. 성격이 겹쳐 보일 때는 달랐다. 그는 나를 앞에 앉혀두고 내가 앞으로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미리 일러주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하지도 않은 행동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는 낮고 조용한 음성을 듣는다. 왜 얘는 그런 애가 아닌데 자꾸 그런 말을 하냐고 언성을 높이는 엄마의 개입이 있을 때까지. 그저 흔들리는 눈을 마주하며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안 해 하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다. 


주양육자 두 명의 날 향한 부정,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끊임없는 소극적인 설득 시도. 그러나 대체로 실패로 돌아가는. 이것이 바로 내 유서 깊은 자기 검열의 핵심 씨앗이다. 의무교육 기간 동안 깊게 내린 뿌리는 줄기를 이루어 땅을 뚫고 나왔으며, 무럭무럭 자라 청소년기 연애시절에 한번 화려한 꽃을 피워냈더랬다. 그렇게 시들고 말 줄 알았는데, 대학원에 입학 후 나는 이게 들꽃이 아닌 상록수가 될 녀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한 번 더 강조하는 말이지만 이모부는 심심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양귀자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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