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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Oct 17. 2024

결코 널 외롭게 두지 않을 테지만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살림, 2019

안녕 우리 딸.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있어서 하나에게 편지를 써. 오늘은 너를 낳고 키우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네가 성장하는 모든 순간 옆에 있고 싶은 나와, 때로는 혼자일 수밖에 없을 너의 시간들에 대해서도.


아이를 낳은 엄마들의 마음이 대부분 비슷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아들과 딸의 차이는 엄청나단다. 엄마는 오빠를 낳고 조바심이 들었어. 몇 년만 있으면 함께 목욕탕에 갈 수 없고, 남자로 자라면서 엄마가 모르는 세계 속에 살겠지.

어른이 되면 더욱 적당한 간격을 두려고 노력해야 할 거야. 그래서 갓난쟁이였을 때부터 하루하루가 아까웠단다. 품에 안고 있는 시간, 함께 손잡고 걷는 시간, 입술에 뽀뽀를 해줄 수 있는 시간이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처럼 줄어들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지. 얼마나 허락될지 모르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고 싶었어. 나중에 엄마 품을 떠날 때 한 톨의 아쉬움도 남지 않도록.


그런데 3년 뒤 네가 태어났어. 엄마는 네가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안심했던 것 같아. 평생을 아주 천천히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아이가 내게도 생겼구나 기뻐서. 너와의 모든 시간은 네가 원하는 한 기한 없이 흐를 거야. 네가 엄마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난 네 옆을 떠나지 않겠지.

네가 처음 생리를 하는 날의 당혹감 다독여 주고, 연애를 하며 울고 웃을 때 내 불안한 마음은 최대한 숨기고 널 지켜볼 거야. 네가 결혼을 한다면 든든한 친정엄마가, 아이를 낳는다면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단다.  


참 신기하지, 네가 태어난 후로 세상의 모든 소녀들이 내 아이로 보여. 네 나이 또래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야. 훌륭한 여성이나 멋진 아가씨를 보고도 더 이상 나에게 대입하지 않지. 그저 미래의 내 아이로 보일 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으면서도 계속 네 생각을 했단다. 엄마가 카야를 떠났을 때 아주 잠시 그 엄마를 이해하려 했다가 곧 다시 혼자가 된 카야로 돌아와 너를 보듯 카야를 보며 책장을 넘겼지.


아주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카야는 낡은 집에서 혼자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게 돼.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옆에서 빵을 먹고 있는 7살의 너와 딱 같은 나이야. 엄마는 안쓰럽고 대견한 마음으로 카야가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책에 푹 빠져 며칠을 보냈단다.

특히나 해안 늪지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면은 엄마를 책 속의 세계로 잡아당겼어. 엄마는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쓴 책을 좋아하는 편이야. 판사가 쓴 법이야기라던가(손호영,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음악가나 (김목이, <직업으로서의 음악가>) 천문학자가 쓴 에세이(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같은 책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도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한 생태학자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쓴 첫 소설이더라고. 그제야 엄마가 왜 이 책이 좋았는지, 그림 같은 묘사가 얼마나 탄탄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인지 납득할 수 있었지.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관찰하고 연구한 사람이 쓴 책은 전업 작가의 책과는 또 다른 기분으로 읽게 돼. 내가 모르던 삶을 이렇게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하고 감사한 일이니. 특히 이 책은 주인공인 카야의 전 생애가 담겨 있으니 누군가의 삶을(허구의 인물이라도) 빨리 감기 하듯 책 한 권으로 엿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일 거야.

지금은 네가 하루 두 권 책을 읽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도 되는 양 뒤로 미루고 있지만(그래서 엄마가 너에게 책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주 나중에라도 책이 너의 친구가 되길 바라고 있어. 카야가 자연과 책에서 세상을 배웠듯이, 책이 너의 즐거움이자 도피처가 되어주길 바란단다.



그해 여름 카야와 테이트는 쓰러져가는 통나무집에서 읽기 수업을 했다. 팔월 중순쯤 <모래 군의 열두 달>을 독파했고, 카야는 책에 나오는 단어를 거의 다 익혔다. 저자인 알도 레오폴드한테서 범람원은 살아 있는 강의 팔다리나 마찬가지고, 강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중략) 어떤 씨앗들은 바짝 마른 흙 속에서 잠을 자며 수십 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물이 다시 집에 돌아오면 흙을 뚫고 힘차게 솟아올라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자연의 경이와 실제 삶의 지식,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버젓이 주위에 노출되어 있는데 씨앗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진실들.
p.142


케이스와 테이트, 카야의 직업이나 책의 결말이 되는 카야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게. 네가 이 책을 읽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그 즐거움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단지 엄마가 노파심에 이야기하자면 우리 딸. 네 삶에는 가족과 친구가 항상 곁에 있길 바라지만(결코 널 외롭게 두지 않을 테지만)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반드시 혼자인 시간은 찾아온단다. 마치 안 좋은 영화의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네. 

다만, 카야에게 습지와 책이 있었듯 너에게도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책이 해답을 줄 거라 얘기해 주고 싶어.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고 그때를 지나가길 바랄 뿐이야. 부디 그 외로움이 네 인생 전부를 흔들지 않길. 


학교에 갔던 날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 백열을 내뿜는 태양 아래 카야는 해변에 있는 오빠의 나무 요새에 올라가서 해골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는 배를 찾았다.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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